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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러 가자고요
김종광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6월
평점 :
몇 달 전에 로버트 뉴튼 펙의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을 상당히 인상 깊게 읽었다. 제목만 보고, 블랙코미디일까, 싶었던 이 책은 한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소년의 성장소설이었다. 소설은 로버트 뉴튼 펙의 자전적 소설로, 주인공 로버트는 세속적 삶을 멀리한 셰이커 교인으로서 근면 성실하게 농장 일을 하며 살아간다. 그 가족들이 믿는 하느님은 그들의 검소한 삶을 보고 기뻐했을지 모르지만, 로버트는 힘들었다. 노동의 힘듦보다 가난에 찌들어 사는 부모님을 보는 것이 더 힘들었다. 로버트가 어느 날 아침 돌아가신 아버지를 발견하고 장례를 준비할 때, 몸에 맞지 않던 허름한 정장을 입으며 분노한다.
하느님, 왜 이렇게 가난해야 합니까?
이 말이 책에서 튀어나와 내 심장을 파고든 듯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미국은 겉으로는 화려해 보여도, 지역 간 격차가 크고, 직업이나 종교에 따라 그들의 삶의 방식은 천차만별이다. 소설의 배경이 1940년 대면, 미국 대도시들은 이미 고도로 발전했을 때다. 하지만 이때도 미국 시골 어느 곳에서는 힘들 게 노동을 하고, 매일매일 힘들게 돼지 멱을 따며 살아야 했다. 이 소설이 정말 1940년대가 배경인지 긴가민가했을 정도로, 마크 트웨인이 살았던 19세기 미국의 깡촌 시골 같았다. 깊은 인상을 받았다. 복잡다단하고 다양한 면모를 가진 미국의 또 새로운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그리고 좋았다. 물론 소설 속 사람들은 가난 때문에 힘들었지만, 지구 반대편에 언젠가 살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고, 무슨 일을 했으며, 무엇을 먹었고,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느꼈는지 그들을 이해할 수 있어서였다. 단순히 앎의 문제가 아니라, 공감이랄까, 그런 감정을 느꼈다. (최고의 공감은 '눈물'이 아닐까. 위에 쓴 "하느님, 왜 이렇게 가난해야 합니까?"를 읽었을 때 진심으로 눈물이 났다.)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은 자전적 소설이나, 그 당시 농촌의 삶을 잘 보여준 소설이다. 우리나라는 왜 이런 소설이 없을까 생각했다. 도시 이주, 인간소외의 문제 혹은 농촌이나 소도시에서 일어난 범죄를 다룬 소설은 있어도 본격 농촌 소설은 읽어 본 적이 없다. 혹은 도시로 상경한 소설가가 어린 시절을 반추한 자전적 글은 있어도 말이다.

지난 주말에 읽고, 오늘 토요일에 재독한 김종광의 『놀러 가자고요』. 우리나라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농촌 소설이다. 소설가가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쓴 소설이 아니고, 옛날 옛적 이야기도 아니다. 지금, 바로 이 순간에 농촌에서 일어나는 일을 소설화한 소설집이다. 귀하디 귀하다. 이 소설을 읽으니, 위에 언급한 로버트 뉴튼 펙의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우리나라에도 드디어 본격 농촌 소설이!!! 기쁨 반, 설렘 반.
이 책도 눈물샘을 자극한다. 농촌이 슬픈 거냐, 농사일이 슬픈 거냐, 노동이 슬픈 거냐. 누군가를 위한 노동이어서 슬픈 거냐. 참 여러 부분에서 울었다. 저번 주에 처음 읽었을 때도 그랬고, 오늘 재독할 때 또 눈물이 나더라. 이 소설집의 맨 끝 이야기는, '한숨'에 관한 단편소설인데 역시 그 한숨의 의미를 나도 알아서 일까. 한숨은 한(恨)과 상통하니까. 우리나라 누구든 이 한숨의 의미를, 한의 의미를 아니까.
이 소설집에는 총 9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각기 다른 이야기 같지만, 목걸이처럼 한 줄로 꿰어진다. 맨 앞에 실린 「장기호랑이」만 유독 다른 이야기 같으나, 실은 다른 이야기들의 번외 편이랄까. 번외일 뿐 이 소설도 다른 소설과 이어진다. (아이 이름이 임취현으로 나와서 성은 다르지만, 나는 장기왕왕왕의 아버지가 소판돈 씨인 걸 확신한다!!)
이 소설집은 '범골'이라는 시골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맨 처음 이야기인 「장기호랑이」와 맨 끝 이야기 「아홉 살배기의 한숨」은 도시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이지만, 실상 연계해 보면 그들의 부모는 범골에 살고, 인물과 이야기가 교차된다.
두 번째, 세 번째 소설은 이 소설의 배경인 '범골'을 소개하는 꼭지다. 범골을 소개하긴 한데, 동네를 소개하기 보다 그곳의 사람들에 대한 소개다. '내고만드' 출판사 대표(그래봤자 2인 기업)로 범골의 역사를 정리하기로 한 성염구, 그의 아내 조선족 서다해, 나름 이 동네에서 출세한 국문학자 임교수, 음유시인 이담무, 입이 거칠어 왕따인 가발댁, 이 소설을 쓴 '박종광' 작가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소설가 소판돈, 엄청난 별명을 자랑하는 김천소, 천하 여장사 이덕순, 모내기의 달인들(변화하는 시대에 따라 달인들도 달라진다), 자식들 모두 잘 나가는 방씨네(하지만 뒤에 실린 다른 단편 보면 둘째 놈이 사업한다고 다 말아먹음), 노인회장 김사또, 그의 아내 오지랖 여사 등 많은 불들에 대해 소개되어 있다. 나중에 마늘댁으로 바뀌는 청올치댁도 빼놓을 수 없겠고 마늘댁이 뭐를 하든 무조건 심사가 틀렸던 가발댁(하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그들의 장남과 막내딸이 결혼을 한다지요) 다양한 인물들이 나온다.
외지 사람들, 특히나 도시 사람들은 아무런 관심이 없지만 시골에 사는 그분들은 각기 특기가 있고, 모두 생활의 달인이다. 취미를 위해서도 아니고, 어떤 숭고한 목적도 없다. 그냥 생활을 위해서, 먹고 살기 위해서, 자식 키우기 위해서 갈고 닦은 특기들이다. 그만하면 '열전'에 실릴만 하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집에 실린 「놀러 가자고요」와 「산후조리」가 참 좋았다. 읽다가 눈물도 참 많이 났는데, 이것도 참 웃기지. 난 한 번도 시골에서 살아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다 공감이 되고 눈물이 나던지.
「놀러 가자고요」는 노인회장을 맡고 있는 남편을 대신해, 아내인 오지랖 여사가 마을 사람들에게 전화를 돌려, 이번주 일요일에 놀러를 갈 건지, 안 갈 건지 묻는 단편이다. 전화 대화로 이뤄진 구성도 마음에 들었고, 그 안에 든 이야기들도 참 좋았다. 전화를 돌리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려는 이웃도 있고, 냉담함을 넘어서 화를 내는 사람도 있다. 오지랖 여사의 남편을 칭찬해 주는 사람도 있고, 동창이라 막대하지만 마음 편하게 대해주는 사람도 있다.
나중에 상큼이가 쓴 글이 책으로 나온대. 자기 것만 나오는 게 아니라 상 탄 애들 거 다 나온다지만, 내가 아무리 돈이 없어도 그 책을 한 백 권은 사서 쫙 뿌릴 테야. 오지랖댁한테는 일등으로 줄게. 아이구, 나는 생전 처음 알았어. 너무 좋아도 눈물이 철철 난다는 걸. 좋은 일이 있어봤어야 알지. 자꾸만 눈물이 나. (- 107쪽)
네 말 듣고 있으니까 더 살고 싶다. 오지랖아. 나 정말 죽고 싶지 않다. 나 참 선량하게 살았다. 내가 왜 벌써 죽어야 하나? 우냐? 울어도 시원치 않을 사람은 난데. 네가 왜 울어? (- 123쪽)

「산후조리」는 출산이 얼마 남지 않은 암소가, 똥구녕 밖으로 속 내장을 다 내놓아, 죽을 고비를 겪는다는 이야기인데 주인 할머니가 애지중지 보살펴 새끼도 무사히 낳고, 밖으로 나온 내장은 집어 넣고, 배 곯고 죽을 뻔한 어미 소와 아기 소 모두 살리는 이야기다. 할머니의 독백 형식으로 구성된 단편으로, 할머니의 마음과 할머니의 생각에 참 많이 감정이입된다.
아직 두 눈 뜨고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죽으라고 내버려 둘 수는 없다. 고작 20개월 산 소한테 너는 살 만큼 살았다고 하는 게 우습기는 하지만, 소 팔자에 그 정도 살았으면 주곡 싶기도 하겠다고 어미 소는 네 뜻대로 하여라 보아 넘기더라도, 새끼는 하루라도 더 살다 가도록 하고 싶었다. 세상에 나와 겨우 사나흘 살다 가면 너무 불쌍하지 않나. (- 236쪽)

시골에 한 번도 살아본 적도 없어도 무던히도 공감하고 눈물이 났던 소설들. 한이 무언지 아는 한반도 사람이라 그런가... 좋았다.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에 나왔던 "하느님, 왜 이렇게 가난해야 합니까?"의 외침도 떠오르곤 했다. 물론 이 정도의 비극적 가난은 이 소설에 나오지 않고, 전반적으로 그런 무거움이 없다. 가벼우면서도 우리의 슬픔과 한이 참 잘 느껴졌다. 이런 게 우리 정서가 아닐까 싶다. 한숨을 푹푹 쉬면서도, 또 작은 일에 헤헤 웃고, 또 힘든 일이 생겨 죽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가 누가 해주는 작은 공감에 마음이 풀리고 웃는 삶.
이런 소설이 우리나라에도 있다는데 놀라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우리에겐 다양한 이야기, 다양한 소설, 다양한 작가가 필요하다. 이 소설이 많이, 널리, 읽히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