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 밤과 서쪽으로
베릴 마크햄 지음, 한유주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글이 아름답다.

1902년에 영국에서 태어난 베릴 마크햄은 1906년 아버지와 단 둘이 아프리카 케냐로 이주한다. 그녀는 아프리카 원주민 아이들과 함께 자라는데 같이 싸움도 하고, 위험한 사냥도 한다. 어느 정도 컸을 무렵 극심한 가뭄으로 아버지 농장이 망하자 베릴 마크햄은 홀로 길을 떠난다. 그 후 온갖 일을 겪으며 많은 일들을 하나씩 이뤄내는데 그 기록들이 놀랍다. 하나를 꼽으라면, 혼자 비행기를 몰고 혼자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도착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이때가 1936년, 34살 때다.
지금도 아프리카는 다른 대륙에 비해 낙후된 곳이다. 100년 전 아프리카는 정말 어떤 곳이었을까. 이 책을 보면 뭐랄까, 참담하다고 말할 정도다. 가뭄으로 인한 극심한 고통은, 인류가 농경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겪었을짐한 일 아닌가. 아프리카 역시 아메리카처럼 골드러시로, 아프리카 시골에 몰려든 혹은 밀려든 사람들이 많았다.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왔으나 그들이 얻은 건 소량의 금 부스러기와 죽을 병이다. 그들은 처참하게 죽어간다. 죽기 직전의 사람은, 이미 사자(死者)의 형상이 뚜렷이 있다. 산 자는 그 모습을 편히 받아들이기 힘들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붙잡는다. 1년 이상 듣지 못한 나이로비에 무슨 새로운 소식이라도 있는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며칠, 혹은 내일, 어쩌면 몇 시간 후에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이 나이로비 소식이 궁금하다. ‘충족되지 않은 호기심은 죽음을 그토록 힘들게 한다. (52쪽)’
“사람들은 잊죠. 한 집단이 사람 하나 잊는 것은 쉽지만, 이런 데서 너무 오래 지내다 보면 그간 만났던 사람들을 하나씩 전부 기억하게 됩니다. 한 번도 호감을 갖지 않았던 사람들도 걱정하게 되죠. 심지어는 앙숙이었던 사람들도 그리워집니다. 전부 생각할 거리가 되고, 그게 도움이 되죠.” (55쪽)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남자는 누군가의 안부를 묻는다.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면서. 베릴 마크햄은 거짓말을 한다. 모르는 사람이지만, 그의 안부를 전해준 것이다. 그녀는 떠났고 그녀가 떠난 지 얼마 안 돼서 그 남자는 죽었을 것이다(그녀는 죽었을지도 모르는 또 다른 남자를 구하러 가기 위해 떠났다). 세월이 지나 베릴 마크햄은 죽어가는 남자가 안부를 물었던 그 남자를 만난다. 하지만 그 남자는 죽은 남자를 기억하지 못했다. 역시나 오지에 떨어져 있는 사람만이, 예전 사람들을 그리워하며 그들의 안부가 궁금한가 보다.
이 책은 베릴 마크햄의 파란만장한 삶이 적혀 있다. 아프리카에서의 삶은 때론 거칠고, 때론 위험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름답다. 아프리카는 석양이 그렇게 아름답다는데, 아름다운 석양의 영향 때문일까. 베릴 마크햄의 문체만 보면 감수성 있고, 세상을 아름답게 볼 줄 아는 영국 상류층 여성이 쓴 것 같다. 하지만 그녀는 강한 생명력과 모험심 강한 여성이다. 그리고 삶과 죽음의 경계가 아슬아슬하게 놓인 아프리카에서 자랐기 때문인지 글 여기저기에 철학이 깊이 배어있다. 죽음을 가까이 둔 사람은 철학인이 될 수밖에 없다.
약간 냉소주의자 기질이 있었던 사람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는 그저 살아갈 뿐,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배운 것들이 있다.
나는 살고 사랑했으며 모든 지난날을 깊숙이 묻어둔 곳을 반드시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것, 최대한 미적거리지 말고 가능한 빨리 떠나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절대로 돌아보지 말고 기억에 남은 시간들이 더 행복했다고 생각하지 말 것. 그 시간은 이미 죽었으니까. 지나간 세월은 이미 정복돼 안전하게 보인다. 반면 미래는 만만찮게 보이는 구름 속에 살아있다. 미래로 걸어 들어가면 구름은 걷힌다. 나는 이 사실을 배웠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뒤늦게야 배우게 됐다. (206쪽)
위 글은 베럴 마크햄이 '은조로 농장'을 떠난 이야기를 시작하는 부분에서 발췌했다. 은조로 농장은 그녀의 아버지 농장인데, 극심한 가뭄 때문에 문을 닫았고, 그녀는 떠난다. 떠남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다. 떠남과 동시에 새로운 모험과 도전을 한다. 이래저래 변화의 시점에 놓인 내가, 그럼에도 여전히 밍기적거리고 있는 나에게 특히나 와닿았던 글이다.
그냥 그렇게 떠나면 된다. 간단한 소지품 몇 가지만 챙긴 채. 미지의 새로운 길을 걷다보면, 짙어보이던 구름과 안개가 어느새 걷혀 뚜렷이 모든 게 드러나고, 그게 현실이 되고, 정복이 되고, 다시 안전하게 보이는 과거가 된다.
아름답고 여성적 에세이이지만, 힘이 있고 여성/남성이 아닌 ‘인간’이 걸어야 하는 길을 보여주는 좋은 책이었다. 참 멋있는 사람, 참 아름다운 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