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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타운 ㅣ 베어타운 3부작 1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평점 :
우리는 승자를 사랑한다.
딱히 호감이 가는 부류가 아니더라도 그렇다.
승자들은 대개 강박적이고 이기적이며 배려심이 없다.
그래도 우리는 그들을 용서한다.
이기기만 하면 그들을 좋아한다.
- 프레드릭 배크만, 『베어타운』, 66쪽.
위 내용을 다음과 같이 고칠 수도 있다.
베어타운 사람들은 승자를 사랑한다.
딱히 호감가는 부류가 아니더라도 그렇다.
승자들은 대개 강박적이고, 이기적이며, 배려심이 없다.
그래도 베어타운 사람은 '그'를 용서한다.
이기기만 하면 '그'를 좋아한다.

『오베라는 남자』를 쓴 프레드릭 배크만의 신작 『베어타운』의 이야기다.
쇠락해 가는 숲 마을 '베어타운', '베어타운'의 인구는 점점 줄어든다. 아이들도 줄어든다. 3개가 있던 학교는 어느새 하나로 줄었다. 공장도 문을 닫았다. 백수가 된 공장 노동자들은 하루 종일 마을 술집에 죽치고 앉아 술을 마시며 화를 내고 싸우며 시간을 허비한다. 희망이 없다. 미래가 없다. 단 하나를 빼고. 베어타운 청소년 아이스하키 팀. 베어타운 마을 사람들이 유일하게 기대하는 것이다. 아이스하키 청소년 팀이 전국 우승을 하면, 시에서 지원이 쏟아질 것이다. 잊혔던 숲 마을이 다시 미국 국민의 온 관심을 받을 것이다. 이 마을에 아이스하키 지원 센터가 지어질 것이다. 아이스하키 선수를 꿈꾸는 전국의 아이들이 베어타운으로 몰려올 것이다. 그럼 인구는 늘고, 인구가 늘면 시의 지원은 더욱 늘어날 것이고, 떠났던 공장이 돌아올 것이다. 그러면 술집에 죽치고 앉아 있는 동네 백수들이 다시 공장으로 일하러 가고, 경제적으로 안정이 된 그들은 결혼을 하고 올망졸망 아이를 낳을 것이다. 그럼 마을 인구는 더욱 늘어나고, 마을은 더욱 커질 것이며 시에서의 지원은 더더욱 많아질 것이다. 모든 것이 선순환 된다. 단, 아이스하키 청소년 팀이 전국 우승을 한다면 말이다.
그래서 이제는 별 볼일 없게 된 마을, 베어타운 사람들은 아이스하키 청소년 팀에게 온 기대를 건다. 그 기대는 도가 지나쳐 집착이 된다. 집착은 이것 아니면 저것, 단 하나의 논리로 이뤄져 있단 거다. '이기거나 지거나.' 이 외에 다른 건 존재하지 않는다. 있을 수 없다.
운동으로 다져진 덩치 17세 남자아이가 힘으로 억눌러 15세 여자아이를 성폭행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빤히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믿는다. 여자아이의 가녀린 손목에 난 시퍼런 멍은 분명 두 눈에 보이지만 마을 사람 눈엔 보이지 않는 것, 있은 적 없는 것이다. 왜 성폭행 당한 지 일주일 지나서 왔냐고, 일부러 결승전 원정 경기를 떠나는 아침, 팀원들이 모두 버스에 탔을 때 경찰을 불러 연행한 것 아니냐고, 이건 다 아이스하키 팀이 결승에서 이길까 질투에 눈이 멀어 한 행동이 아니냐고, 그냥 사춘기 소녀가 관심받고 싶어서 난리를 피우고 소동을 벌인 게 아니냐고 말한다. 베어타운 미래를 망치려고 한 수작. 집착에 눈이 먼 마을 사람들은 이렇게 믿는다.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강하다. 믿음은 사실이 되고, 그 어떤 증거가 있어도 그 증거는 불충분한 증거다. 모든 원흉, 그 여자아이 그리고 그 여자아이의 아버지다.
마을 사람들은 암묵적 동의하에 그 소녀와 그 가족들을 따돌리고 괴롭힌다. 여기서 가해자는 피해자로 둔갑된다. 왜냐, 가해자는 베어타운이 온 기대를 거는 에이스, 유망주이기 때문이다. 베어타운 사람들은 승자를 사랑한다. 딱히 호감 가는 부류가 아니더라도 그렇다. 승자들은 대개 강박적이고 이기적이며 배려심이 없다. 그래도 베어타운 사람들은 '그'를 용서한다. 이기기만 하면 그를 좋아하는 것이다.

청소년 아이스하키 팀 에이스인 케빈이 빠지고서도 결승전에서 이겼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케빈은 그냥 가해자로 남았을 것이다. 에이스이긴 했어도, 빠져도 상관없었을 에이스, 팀에 없어도 되는 그런 존재이니까. 부도덕한 짓을 저질렀으면, 당연히 그 죗값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케빈이 빠진 팀은 아슬아슬했지만 어쨌든 졌다. 아슬아슬했다는 것은, 이길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졌다. 아슬아슬하게 졌다. 그럼 진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경찰에 연행되어 결승전에 불참하게 된 케빈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로 둔갑되고, 피해자인 마야가 가해자가 되어 버린다. 기대가 무너진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기대를 무너뜨린 분풀이를 할, 희생양이 필요하다. 그게 피해자인 마야와 그 가족이다.
공동체의 결집을 위해서는 뭐가 필요할까.
리더의 리더십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또 뭐가 필요할까. 우리가 아닌, 적이 필요하다.
아이스하키는 상당히 거친 운동 경기고, 팀워크가 중요하다. 이 팀워크를 위해 단체 훈련도 중요하지만, 사소한 농담에도 우리가 아닌 적과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비하가 담겨 있다. 적에 대한 혐오와 비하의 말들은 팀의 결속을 단단히 해준다. '와하하하' 웃는 웃음에 상대가 받는 상처는 느낄 수 없다. 그들의 혐오와 비하의 상대는 대부분 자기들보다 약하거나 소수자들이다. 여자, 동성애자, 작거나 말랐거나 뚱뚱하거나 자신보다 힘이 약한 사람들.
베어타운 사람들은, 도시 사람들이 자신들을 무시한다고 화를 내고 열등감에 젖어 살지만 그들은 자기보다 더 약한 사람들을 적대시하며 똘똘 뭉친다. 이건 베어타운 사람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 세상 어느 곳, 그 어느 집단에서도 예외 없이 이 순간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공동체, 우리가 똘똘 뭉치기 위해서는 우리가 아닌 다른 존재, 적이 필요하다. 우리를 우쭐하게 만들 나약하고 비열하고 혐오스러운 존재가 필요하다. 하지만 혐오의 감정, 우릴 우쭐하게 만드는 나약한 존재를 짓밟는 것도 하나의 중독적 증세가 아닐까. 아무것도 해결하는 것도 없이 아무것도 나아지게 하는 것 없이 단지 정신 승리만 있을 뿐이다. 아편보다 더 강력한 중독성. 세상을 나아지게 하는데 아무 의미 없는 중독성.
이 소설이 던지는 메시지는 뭘까. 약자를 짓밟고 정신 승리하는 중독을 극복해라는 게 아닐까.
빙판 위에서 비틀 비틀 거리는 한 소녀가 10년 후 베어타운을 빛나게 할 스타로 자랄 수 있다. 동성애자라고 비난받는 소년이 책임감 있고 리더십 있는 사람으로 자랄 수 있다. 나와 너, 우리와 적, 소수자 이렇게 나누면 이들은 이렇게 클 수가 없다. 구분, 차별 짓기는 그만. 있는 그대로 그 존재를 바라보라는 메시지가 이 소설이 던지는 메시지일 것이다. 소수자에 대한 혐오로 정치적 승리를 이뤄가고 있는 세계적 추세에 대한 프레드릭 배크만의 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