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미 (출간 15주년 기념 백일홍 에디션) - 박완서 산문집
박완서 지음 / 열림원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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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그린 엄마는 꽃들 사이에서 활짝 웃고 있다. 박완서 작가의 산문집 <호미>의 표지에는 맏딸 호원숙 작가가 그린 박완서 작가의 모습은 행복해 보인다. 이런 엄마를 그린 딸의 마음도 덩달아 따뜻해졌을 것 같다. 2007년 초판이 출간되고 2011년 작가가 세상을 떠난 후 2014년 개정판 발간 후 2022년 재출간된 책이다. 글을 읽다보면 작가가 여전히 어디선가 이 평범해보이는 일상의 아름다움을 글로 쓰고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작가의 글은 아직도 옆에 살아있는 듯하다.


박완서 작가의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사실 작가의 책을 제대로 읽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어릴 때는 귀기울여 듣지 않게 되던 이야기가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매력을 느끼게 되고 작가 명성의 이유를 공감하게 되었다.


이 책은 작가가 60대 후반 서울을 떠나 마당이 있는 시골집으로 이사해 정원의 꽃과 나무를 가꾸면서 자연의 변화에서 발견한 삶의 통찰을 담은 이야기, 딸로 손녀로 사랑받으며 자라고 공부했던 시절과 또 자신이 부모와 조부모가 되어 자녀와 손자손녀를 키우며 겪은 이야기, 일제 식민시대와 한국 전쟁 등 자신의 일화로 기억되는 한국의 역사적 사실 , 서울대 박사학위를 받으며 했던 감사인사, 잊지못할 추억의 음식과 그 맛에 대한 기억, 중국이나 네팔 등 해외 여행에서 보고 느낀 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갖고 찾은 개성공단 방문 이야기, 돈독했던 시어머니와 엄마에 대한 기억, 이이화 선생, 이문구 작가, 김상옥 작가, 박수근 화가, 조각가 이영학 등의 별세 후 인연이 있던 그들과의 일화와 소회, 그리고 특별히 맏딸 호원숙 작가에게 남긴 사랑과 신뢰의 당부 등이 담겨있다.


책 제목이 <호미>라 작가가 어린시절부터 호미를 갖고 하는 밭일에 경험이 많거나 자연물에 대한 추억이 많은가 싶었지만 저자가 흙을 만지며 식물을 키워낸 경험은 서울에서 이사온 10여 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도구로 쓰는 호미는 요란하고 전문적인 농기구로서가 아니라 흙을 솎아 부드럽게 하고 소소하게 텃밭을 가꾸며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소박한 노년을 실현하게 해준 친구처럼 보인다.


작가는 매일 달라지는 마당의 꽃이나 나무의 변화를 알아차리며 말을 걸고 지나쳤던 소중한 과거의 기억들을 되짚으며 기억하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남기며 또 천주교와 함께하는 장례식의 모습을 상상하며 신앙을 통해 성숙한 삶의 방식을 찾아가면서 노년의 삶을 안정감있게 꾸려가는 법을 안내하는 듯하다.


하지만 경지에 오른 작가로서 이상적이고 평온한 모습만 보여주려 애쓰지 않는다. 작가는 팔 골절로 고생하면서도 잘 버텨내고, 처마에 생긴 말벌집 애벌레를 센 물살로 제거하며 통쾌함과 미안함을 느끼기도 하고, 중국 산지 여행에서 지게꾼에게 업힐 수 밖에 없어 눈치보면서도 팁 주는 문제로 이런저런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작가는 때로 소소한 일에 번민하고 분노하기도 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거기에서 또 나름의 지혜를 찾는다.


정치혐오에 대한 대목이나 연장자에 대한 인정을 바라는 부분 등 조금은 나와 생각이 다른 부분도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의 인생관을 모두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불가능할테니 내게 와닿은 부분에서 따스한 위로를 얻고 배울 점을 찾는다. 주변의 모든 것들에 마음을 주고 말을 건네며 마음 열어 이해하고자 했던 작가의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삶의 태도, 그리고 그것이 드러났던 솔직하고 겸허한 태도의 글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나의 노년의 삶은 어떤 모습이면 좋을지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도 좋았다.


그러나 가장귀를 끌어당겨만 놓고 차마 잘라내지 못했다. 나무의 체온이랄까, 살아있다는 유연함, 피돌기 같은 수액의 움직임, 그런 게 생생하게 느껴질 뿐 아니라 가지마다 다닥다닥 붙은 돌기는 내년 봄에 떠뜨릴 꽃망울의 시작이 아닌가. 살구꽃도 벚꽃도 매화도 우리 눈엔 어느 날 갑자기 활짝 피어나는 것 같지만 이렇게 미리미리 준비를 하는구나. 꽃망울이 얼어죽지도 말라죽지도 않게 보호하고 견디어내야 하는 겨울은 나무들에게 얼마나 혹독할까. 숙연해지는 한편 내년에도 살구꽃을 볼 생각을 하니 가슴이 울렁거렸다. 칠십 고개를 넘고 나서는 오늘 밤 잠들었다가 내일 아침 깨어나지 않아도 여한이 없도록 그저 오늘 하루를 미련 없이 살자고 다짐해 왔느데 그게 아닌가. 내년 봄의 기쁨을 꿈꾸다니... 가슴이 울렁거릴 수 있는 기능이 남아있는 한 그래도 인생은 살만한 것이로구나.

※ 이 책은 출판사를 통해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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