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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울게 하지 못한다 ㅣ 시작시인선 177
이영옥 지음 / 천년의시작 / 2014년 12월
평점 :
절판
크리스마스 아침 이 시집을 펼쳐들었다.
좋은 구절에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는데 얼마안가 줄긋는 걸 포기했다. 거개의 시구에 밑줄을 그어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사유와 공력을 바쳐야 이처럼 빛나는 시어들을 뽑아낼 수 있을까.
시적 대상의 단면을 잘라내어 서사를 골격으로 삼아 상상을 덧입혀 직조해낸 거대한 시의 성전 곳곳에는 시인의 예리한 촉수가 번뜩거린다.
고드름이 산산조각나기 좋은 자세로 매달리기도 하고, 발달장애아가 어미의 웃음을 독점하는가 하면, 철조망에 걸린 돌멩이가 새가 되기도 하고, 터널은 깊은 땅속에서 날아온 초대장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다른 방향으로 불화할 때 더 멀리 가는 '그네'는 어디든 갈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없다.
고드름의 날선 파편에 전율하다가도 허수아비가 뱉어내는 유머 가득한 시어를 읽다보면 이 시인이 지닌 개구지고 천진난만한 서정에 함몰되고 만다.
허수아비
누가 내 팔을 들어 올려 외로움을 한없이 벌려놓은 겁니까
얼굴을 우스꽝스럽게 화장해 한 생애를 낙서한 겁니까
입을 양쪽 귀에 걸어 놓고 웃음을 제 것처럼 꺼내 가는 겁니까
흔들지 않은 종이 제 맘대로 우는 겁니까
언제까지 지푸라기의 푸념을 들어줘야 합니까
무엇을 쫓아내고 무엇을 기다리는 누구를 위한 허허벌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