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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존과학자 - 국립극단 희곡선 2022 ㅣ [창작공감: 작가] 5
윤미희 지음 / 걷는사람 / 2023년 5월
평점 :

넘을 것인가 말 것인가
무대에 문 하나가 보인다.
그리고 자꾸만 지직거리는 텔레비전 한 대가 있다.
닫히고 무너지는 문 앞에서 인물들은 다시 문을 세우고,
고장 난 텔레비전 앞에서는 다시 화면을 켜려 한다.
문은 넘어야 할 목표의 경계이고,
텔레비전은 흘러 버린 기억을 저장해 놓은 상자이다.
그 사이를 갈팡질팡하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남의 일 같지 않다.
아버지는 텔레비전 앞에서 떠나지 않는다.
리모컨 하나로 세상을 마음껏 바꿀 수 있다고 하지만
채널은 바꾸어도 정작 인생은 바꿀 수 없는 사람이다.
보기 싫으면 다른 채널로 돌리고 피하면 된다는 말에는
외면하고 싶은 삶이 숨어있다.
이 연극은 가족 부분 장면이 특히 강점인데
첫째, 둘째, 셋째도 저마다 닫힌 문 앞에 서 있다.
실패하고, 포기하고, 생계를 위해 꿈을 접는다.
쌓고 올리고 내리고
올리고 쌓고 내리고
내리고 쌓고 올리고…
이 가족의 티키타카는 웃기면서도 어딘가 짠하다.
그들이 과연 자기 문을 열 수 있을까라는
궁금증을 키우며 이야기에 빨려 들어간다.
보존과학자1이 낡은 텔레비전에 심폐소생술을 한다.
버려진 것에 생명을 불어넣고
흘러간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극은 다른 층위의 깊이를 갖는다.
무대 크루인 림 송 아누 제제는
이 극의 중요한 오브제인 문 앞에서
지키고 부수고 세우면서
극에 입체적인 활력을 불어넣는다.
네 명씩 짝을 이뤄가며 짜여나가는 열두 인물들의 서사는
치밀한 톱니바퀴에 빈틈없이 맞물려 구동되는
정밀한 스위스 시계 장치를 연상시킨다.
한때 찬란했지만 지금은 쓸모없어진 것들과
이내 사라질 것들 사이에서
쉬이 드러나지 않는 의미를 품고 있는 이야기는 눈부시다.
문은 무너지지만 세워지고
텔레비전은 꺼졌다 다시 켜지지만
그 앞에서 인물들은 하염없이 무너지고 끊임없이 도전한다.
그게 우리네 삶이다.
타 장르로 확장되어도 좋을 폭발력을 지닌 이야기이다.

넌 부수는 역할이야 만드는 역할이 아니라. 계속 부수다 보면 만드는 날도 오지 않을까? 부디 잘 만드는 모습을 보여줘. 당신이 세워 놓은 가치에 따져요. 당신이 믿고 있는 세계에 따져요. 내가 시작이 될 수도 있을까요? 엄청 대단한 게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데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될 수도 있는 거예요. 온 우주가 흔들릴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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