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 맹약을 새로 맺으러 기혁과 시길이 왕 앞으로 나가자, 왕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뭐야, 이건...이라는 표정같다고 혁은 생각했다. 왕은 충성맹세를 받아들이고, 시길을 평민으로 내렸다.
흔한 맹약이거든...하는 얼굴에 시길은 등에 땀이 솟았다.
지금은 저런 표정이지만 공주가 임신한 것이 자신의 아이라고 알게 되면...

“자넨 가보고.”

혁에게 그렇게 말한 후 왕은 거의 왕좌에 엉덩이도 걸치지 않고 홀을 들었다.

“왜 너만 두었는지 알겠지?”

시길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잘 알고 있습니다.”

“잘 알고 있어?”

왕은 왕좌에서 튕기듯이 일어나서 발로 시길의 가슴팍을 확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쳤다.
시길은 뒤로 물러났다가 신음소리를 토해냈다.

“지금 상황이 파악이 되나? 안되나?”

“폐...하.”

“내 기분 개떡같은 거 아느냐고. 네놈이!”

“......”

“그 앤 원래 그런 애다. 너하고 결혼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어. 하지만 이미 정해진 걸 어떻게 무르려고! 네가 그 왕자의 상대가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죄송합니다.”

“연극은 그만해.”

왕은 분노를 이내 가라앉히고 시길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가락질을 했다.

“그 애 네 애가 아닌 거 안다.”

“...어떻게...”

“딱 보면 알아. 공주하고 내가 얼마나 친분이 깊은지 모르나?”

“...그럼...”

“넌 다시 귀족이 되는 거지...좋은 거래야. 하지만 넌 거기까지 머리 굴릴 위인이 못되지.”

“.....”

“가 봐.”

왕이 다시 손가락질을 하다가 멈췄다.

“잠깐.”

“네?”

“너, 기왕 우리 왕가 사람이 되었으니...내 부탁 한가지만 들어다오.”

“...무슨 말씀이십니까?”

“애가 태어나면...”

시길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짐작했다. 좀 둔한 그이기는 했지만 왕이 그에게 좋은 이야길 해줄 턱이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 아기를 안고 공주랑 같이 그때쯤 귀국하는 다희양의 환송식에 나와라. 그리고 아길 그 여자에게 안겨줘.”

“...네?”

“알고 있겠지. 난 복수를 원해. 하지만 예술적인 복수가 그 여자한텐 더 잘 어울리겠다.”

“그건...안됩니다.”

시길이 가슴 통증을 느끼면서 말했다. 얻어맞아서 가슴이 아픈가? 그건 아니었다.
이것은...배반에 합당한 복수인것이다...
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배반한 댓가...

“명령이다.”

왕은 냉정하게 말했다.

“난 원한다. 네가 그 여자에게 가장 가혹한 상처를 줄 것을. 왜냐하면 그 여자가 가장 사랑하는 건 너니까.”

왕은 왕좌 옆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았던 신문을 시길의 얼굴에 집어던졌다.
그 신문에는 열연하는 다희의 얼굴이 크게 나와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건 거울같은 배우 앞에서 연기 하는 것.]

그 거울이.
지금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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