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진이 공주에게 받은 돈으로 극단을 새로 만들어 출국했다. 공항으로 따라 가고 싶었지만 시길은 영지에서 공주와 함께 지내야 했다. 시길은 공주의 숨결 하나 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녀는 아름다웠지만 그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나무와도 같았다. 그 나무 주변에서는 썩은 냄새가 났다. 건강한 생태계를 위한 부엽토가 아니라 독버섯의 썩은 내가 진동을 했다.

그 썩은 내를 침대에 나란히 누워 견디려는 시길이 공주는 좀 안쓰러웠다.
공주는 자신의 체취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한가지는 있었다. 그녀에겐 상상력이 있었다.
시길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 것이라는 것을.

“그만 포기해.”

공주는 그녀쪽으로 고개조차 돌리지 않는 시길의 팔을 붙잡았다.

“당신은 이제 내 남편이야. 결혼식만 올리게 되면...”

“...아니, 당신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 의미도 없어.”

시길은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약혼 반지를 보고 고개를 돌렸다.

“봐. 난 당신에게 반지를 주지 않았어.”

“...이 반지 때문에 그러는 거야?”

공주는 얼른 그에게서 손을 떼고 끼워져 있던 반지를 바닥에 던졌다.

“...내게 아직...미련이 있어?”

시길은 그녀에게 물었다.

“엄연히 약혼한 사람이 있는데도, 그 반지를 꼈는데도 나와 함께 해야 할 이유가 있었어?”

“반지 던졌잖아. 이젠 없어. 그러니 이제 나하고 결혼을...”

“당신은 연기를 무척 잘 하는군.”

시길이 똑바로 그녀의 눈을 쳐다보았다. 한때는 이 눈을 정면으로 보게 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무슨...뜻이야?”

“아기. 그 아기를 내 이름으로 올리고 싶은 거지? 가장 만만한 상대로, 귀족도 아니고 평민도 아닌 전직 배우를...”

“...어떻게...!”

시길은 그녀의 손을 그녀 자신의 배에 갖다대게 했다.

“나는 자질이 떨어지는 배우이긴 해도 표정을 바꾸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고, 또 그 방법을 배웠어. 당신은 날 따라 한 거야. 배우처럼. 하지만 일급 배우는 아니었지.”

“...그럼 더욱 내 말을 들어야지. 양국간에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

“나하고 사이에 아이가 있다는 걸로 바꿔봤자...”

“안돼!”

공주가 절박하게 말했다.

“좋아. 너한테 다 말할게. 네가 원하는 건 다 해줄 수 있어. 하지만 진상은 결코 밝혀져서 안돼! 난 아이의 아버지가 전쟁터에서 죽는 꼴은 도저히 못 봐. 그 사람의 아이지만, 사랑하는 그 사람의 아이지만, 정체가 밝혀지면...”

“왜 약혼자를 버린...”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주는 시길에게 입맞춤 했다.

“결코 모두에게 알려서는 안돼...”

공주의 검정 옷이 시길의 하얀 옷을 감쌌다. 하늘하늘한 검정 옷이 흰 옷을 감싼 모양이 꼭 검은 튤립이 눈의 땅에서 피어오르려는 것 같았다.
분노때문인지 아니면 격정때문인지 시길은 그녀를 꼭 감싸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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