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백작.”

진기혁은 머리를 숙였다.

“잘못했습니다. 우리 잘못입니다.”

“무슨 말씀이신?”

시길은 머리의 골이 울리는 걸 억지로 참고 있었다. 파혼...공주가 내민 조건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 두 여자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그가 할 수 있는 걸 하라고.
진기혁에게 경인을 넘기고, 구진에게 다희를 넘기라는 말은 그의 영혼 중 삼분의 이를 덜어내라는 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니, 우린 그냥...”

“문서가 말해주지 않습니까. 전 깨끗이 포기하겠습니다.”

시길의 말에 진기혁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럼 결혼은 어떡하고.”

“...서류대로 원래 백작은 당신이 아닙니까. 당신이 더 잘 알겠죠. 서류에 있는 대로 당신은 경인양과 결혼하는 겁니다. 신랑만 바뀌는 결혼식이니 크게 문제될 것 없을 겁니다.”

-서류가 복잡해졌다던데.-

공주가 속삭이던 말이 떠올랐다.

-애초에 상속대로라면 그대는 그 여자들하곤 상관없다니까?아직 포기를  못했어?-

어젯밤에도 공주는 계속 그의 귀에 저주에 가까운 말들을 퍼부었다.
왕가의 먼 친척이 된다는 기쁨도, 엄청난 돈을 받게 되리라는 예상도 그에겐 아무 상관이 없었다.

-이렇게 써.-

공주는 그의 손에 만년필을 억지로 쥐어주었다.

-다희씨에게.-

뭘 이야기하려는 건지는 분명했다.

[나는 이제 부마가 되려고 합니다. 당신의 연기는 너무 질립니다. 이제 당신의 연기 상대를 하는 것도 지겨워졌습니다. 아니, 연기 자체가 지겨워졌어요. 이젠 공주의 남편이 되어 편하게 살렵니다. 당신은 이제 한물 간 연출가 노씨와 함께 적당히 인원 수 채워서 시민회관이나 도세요. 그게 당신에게 더 잘 어울립니다.]

공주가 부르는 말을 다 받아적자 공주가 입술을 살짝 혀로 핥고는 다시 말했다.

-잘 하네?-

-......-

-하나 더 쓰자.-

-......-

그는 반항할 힘조차 없었다. 공주가 뭔가를 숨기기 위해서 자신을 이용하는 건 분명한데...그게 무엇인지는 잘 몰랐다.

-경인양에게-

공주가 천천히 불러주었다. 시길은 마치 자동인형처럼 아무 감정없이 받아썼다. 그리고는 옆에 파고드는 공주를 밀어내고 의자에서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자신의 연기는 항상 자신을 바라봐주는 다희를 향했다. 그리고 그런 다희를 향한 모습을 봐주는 수많은 군중들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젠 부마라는 직책이 생길 것이다. 결코 원하지 않았던 자리.

-연기가 널 자유롭게 해줄 줄 알았어?-

그의 손에 밀린 공주가 악다구니를 썼다.

-아니, 그게 오히려 널 압박하고 있을 뿐이야. 다희라는 여자가 나보다 나을 게 뭔데? 엉? 넌 공주랑 결혼하는 거라고!-

그리고 시길은 눈앞에 있는 진기혁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경인양을 잘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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