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길은 뇌전증이 거의 회복되자마자 아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연극 복귀 이야기를 했다. 당연히 왕립 연극단에서 복귀는 희망적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응답을 받자마자 시길은 안한다고 단 한마디만 했다.
멍하니 초점 잃은 눈으로 희망도 없고, 절망도 없고 그저 덤덤한 무기물같은 인생처럼 보이는 시길…
경인은 그 덤덤함에는 익숙해져 있었다. 어차피 결혼할 사람이니 미리 익숙해지는 것도 괜찮았다.
하지만 장모 입장에선 곧 장가와야 할 사위가 축 늘어져 있는 건 용납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어느 정도 예측을 했기에 시길이 입원하자마자 경인에게 [그들]에게 전화하려고 닦달질을 했다.
경인이 다희에게 전화하는 것을 미루는데도 말이다.

“어, 오늘은 머리가 바뀌었네요.”

언제 아팠냐는 듯이 욕실에서 머리를 말리고 나온 시길의 말에 경인이 빙긋 웃어보였다.

“며칠 전에는 길었었는데…”

“당신은 참…”

경인이 얼굴을 살짝 아래로 내려뜨리자 공들여한 컷머리가 더욱 청초해보였다.

“그러고보니 내가 신세를 많이 졌네요. 우리 영지에서 구경도 한번 못 시켜주고…하긴 영지 주인인 나도 잘 안 나가니까.”

“…꼭 복귀해야 하나요?”

경인의 말에 시길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건 마음은 정했으되 결론은 내리지 않았을 때 그가 흔히 하는 태도였다.

“왜요…연극배우들이 삶이 싫으신가요?”

“…꼭 해야 할 필욘 없잖아요. 맘대로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 수 있는 돈이 있는데!”

그녀의 말에 순간적으로 시길의 얼굴이 부분별로 굳어졌다.

“돈 그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나요? 당신은?”

“하지만!”

“내겐 연기라는 것은…”

시길이 조용히 읊조렸다. 마치 여기가 병원이 아니고, 여기가 도시가 아니고, 낙엽송이 가득한 울긋불긋한 산에 있는 것처럼, 마치 산책하는 것처럼, 그것도 개나 고양이를 동반한 다소 부산스런 산책이 아니라…
혼자서…그러니까 혼자서 오롯이 보온병에 차나 커피를 담아와 마시는 것과 같은…

“태어나면서부터, 걷기 시작할 때부터, 거울을 볼 떄부터…였어요. 그건 [나]에요. 그리고 그건 혼자서 할 수 없는 거에요. 거울이 필요해요.”

“거울 갖다줄게요. 열, 백, 천, 만 전부 다!”

“왜 그렇게 싫어하죠?”

시길은 나른한 표정으로 경인을 내려다보았다. 키 큰 아가씨보다 조금 더 큰 그는 조심스럽게 예비 신부의 이마를 쓸어내렸다.

“당신을 그 여자한테 빼앗기고 싶지…않아요…”

“…하지만 난…”

그녀를 그에게 뺴앗기고 난 후에 어리석게 구하는 걸까.

아니면 일부러 그 사람들 사이를 훼방을 놓는 것일까…
하지만 한가지만큼은 분명했던 것.

[그대가 없으면 내게 거울을 비춰줄 사람이 없으니까. 당신은 나의 거울…]

“약속할게요.”

시길이 그녀에게 말했다.

“난 그녀를 예전에 사랑했던 것처럼 사랑하지 않아요. 난 당신을 사랑하니까 당신을 떠나지 않을 거에요. 그러니까…극단에 올라가 있는 동안만큼은 그저 잊고, 극단 밖의 나만 잊지 말고 사랑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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