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그 여자가 당신한테 잘해줬기 때문에 사랑한 거였군요. 하지만 지금은?”
“…음…”
시길은 천천히 자신의 손을 폈다. 그리고 경인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멀리 했다.
“아직은 뭐라고 이야기하진 못하겠어요.”
“그 이후에 그녀가 도망쳤기 때문에 마음을 잃은 건 아닌 가요?”
그랬다. 시길이 본격적으로 배우가 되고 나서부터 다희는 그를 멀리했다. 무엇때문이었을까?
어느 날인가. 시길은 다희가 눈물을 흘리면서 짐을 꾸리는 걸 보았다.
“누나? 어디로 가는 거예요?”
“…그냥 거기 있어.”
시길이 주섬주섬 옷을 챙기면서 일어나자 다희는 눈물을 닦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거에요?”
“아니…아니. 아무것도 아냐. 좀 있다가 구진이 와서 날 데리러 올 거야.”
“누나!”
“멀리 가진 않을 거야. 우리 둘이서 소도시에 구경을 좀 가기로 했어…널 너무 혼자 놔두진 않을게. 넌 소중한 사람이니까.”
그녀는 시길에게 다가와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노구진은 다희가 시길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 걸 보고 팔에 힘을 줬다. 사파리 셔츠 차림이어서 그의 팔에는 근육이 두드러져보였다.
“가지.”
경직된 말투에서 시길은 구진이 자신을 그 순간 죽이고 싶을 정도의 마음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알았어. 날 어디든 데려가도 좋아!”
“배우훈련 시키는 거야. 내가 너한테 맘이 있다고 해서 이렇게 사람 심기를 건드리면 곤란해.”
구진은 딱딱한 어조였지만 그래도 진심은 아닌 듯 다희의 팔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고마워!”
다희는 구진의 이마에도 입을 맞췄다. 순간적으로 구진의 눈동자가 부드럽게 풀렸다.
“좋아. 각오는 되어 있지? 가자고!”
그렇게 시길은 눈앞에서 다희를 잃었다.
노구진이 약간 눈살을 찌푸리면서 시길을 노려보는 것 같았지만 그건 어쨌든 좋았다.
그는 그저 이렇게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녀가 내 마음을 어느 새인가 읽어…버렸어.’
배우가 되면 다른 사람들한테 쉽게 감정을 읽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시작한 일이었는데…오히려 너무 잘 보이게 되어버렸나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야 말았다.
그가 스위스에 있을 때 박사는 첫 대면에 이렇게 말했었다.
‘자넨 바보인가?아니면 백치인가?’
쉽게 속마음을 읽혀버려서 시작했던 취미가 오히려 같은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들키기 쉬운 종류의 막이었다니…
하지만 시길은 그 말은 경인에게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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