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다희는 히스테리의 절정이었다.
상대역을 다그치는 그 순간, 구진은 잠시 정신을 돌리기 위해 시길에게 갔다.

그날 마침 엑스트라 하나가 허리뼈가 나가는 바람에 시길이 잠시 대역을 맡았었다.
서 있기만 하는 대역이었지만, 묘하게 극에서 도드라져 보였다.
외모를 드러내진 않았는데도 그의 해사한 느낌이 도는 느낌?

“아주 애송이는 아닌데?”

시길에게 대역을 시켰다고 히스테리를 부리던 그녀를 떠올리며 
다희를 상대하다 진이 빠졌던 구진은 시길의 입 여기저기를 툭툭 건드렸다.

“소리 한 번 내봐. 아, 에, 이, 오, 우.”

시길은 그대로 따라했고, 구진은 고개를 약간 삐뚤게 흔들었다.

“가만 있자…그럼 이건 됐고, 이거 하나 읽어봐.”

구진이 내민 건 극장의 습작가가 끄적이다가 던져버린 대본이었다. 내용이야 워낙 엉망이었던터라 신경도 안 썼지만 입안에서 구르는 맛이 일품인 건 인정한 대본이었다.

“……”

시길은 시키는대로 무감각하게나마 읽었고, 점점 읽는 속도가 빨라지더니 이내 장중하고 우아한 발음을 내기 시작했다.

“…야.”

구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너, 솔직히 말해봐.”

“……”

시길은 그때만해도 세상 돌아가는 걸 잘 몰랐던터라 그대로 시선을 저 멀리에 있던 다희에게 향했다.

“야, 다희 보지 말고, 솔직히 말해봐. 내가 너 다희랑 한 침대 쓴다고 질투하는 건 아닌 건 알지?”

“……”

시길은 눈치 볼 게 없다는 말에 이내 조용히 대답했다.

“뭘 말해야 되지요? 노형?”

“…이거 보게. 은근 백치미로 여자 하나 잡아 놓고 뭘 말해야 되냐고?”

“네.”

뚜렷한 발음에 조용한 판단력까지 곁들여진 목소리에 구진은 잠깐 따끔함을 느꼈다.

“너 이거 처음이 아니지?”

“…이거라뇨?”

민시길의 말에 그는 약간 빠르게 말을 꺼냈다.

“연기 처음이 아니지?”

“……”

그는 여전히 다희를 보다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날은 배도 고프고, 난치병도 도지고 해서…”

“…네 난치병 이야기는 다희한테 많이 들었어. 너 귀족이란 이야기도 오늘 저 쪽에 있는 사람이 이야기해줘서 알았지. 민주선 백작의 손자라고…”

“……”

“왜 진작 이야기 안 했어?”

“…꼭 이야기해야 되는 거였나요?”

“마! 네가 진작에 이야기했으면 다희가 손이 까여가면서 감자 다듬기, 바느질하기 같은 거 인해도 되었잖아!”

물론 삯바느질이라던가, 감자다듬기 아르바이트 같은 건 일종의 시위같은 것이었다.
다희는 그 전에 노구진의 지갑을 통째로 들고 왔었기 때문에 그렇게 어렵게 살지 않아도 되었었다.

“…그건 잘못 되었네요…”

“연기공부는 도대체 왜 하는 거야. 귀족 주제에…밥그릇 떨어지게.”

“네?”

“아냐. 너 잘한다고. 다음에 한 사람 비면 너 땜빵으로 나가라.”

그렇게 이야기를 한 후 노구진은 일어났다. 그리고 가기 전 싸늘한 한 마디를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 그 날은 빨리 올테니까, 이제 다희 고생 그만시키고 떨어져 나가!”

그리고 그만큼 노구진의 후두부를 강타하는 수비도 돌아왔다.

“싫은데요. 전 저 아.가. 씨. 가  좋아요. 아주 순수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여.인.이에요.”

그건 마치 셰익스피어의 대본의 어감을 살려 말하는 듯한 낭랑하고 격조있는 공격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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