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진은 늦게나마 여소장이 잠시 있는 호텔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소장은 기분 좋게 취해 있었고, 그가 부르던 나다희의 후견인은 도착하지 않았다.

“어서 오게. 연출가 선생.”

여소장은 다소 어색한 미소를 띄우면서 그에게 말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 뭐 그렇게까지 할 필욘 없지. 우린 구면 아닌가? 안 그래?”

다희의 후견인이 잠시 마음이 다희에게서 떠났을 때 한번 만난 적이 있긴 있었다. 하지만 구진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 날 위스키를 코가 삐뚤어졌다 마셨던 탓도 있고, 다희 문제로 아버지와 절연한 날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래. 내가 부르긴 했지만 자네가 온 이유는 잘 모르겠군.”

소장의 말에 구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마 사모님이나 곧 오실 분의 의도가 좀 더 많을…”

그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벨이 울렸다.

“자네가 기다리는 그 사람이 온 모양이군. 사내들끼리 사내들 다운 결론을 내도록 하세.”

문이 열리고 준수하지만, 예전의 예리한 수려함은 한결 가신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약간 탈모가 된 앞머리에 붉은 콧대, 부드러운 눈동자를 한 남자.
나다희의 후견인이던 간지용이었다.

“어서오게.”

여소장의 말에 지용은 어깨를 으쓱했다.

“담판짓자고 부른 건가. 자네.”

그 말에 여소장이 피식 웃었다.

“아니. 뭐 그렇게 심각할 거 까지야 있나…우리 경인이가 자네랑 나이 차도…그리고 그 여자도 그렇잖은가…”

“날 따돌리고 그 앨 차지할 생각인가. 여소장. 자네 부인도 눈치는…”

지용은 그 말을 하고 난 후에야 노구진을 보았다.

“아하! 요즘 다희한테 열을 올린다는 사람이 저 친구군! 아니, 바보라는 소문이 도는 그 배우인가? 이거 술을 좀 미리 먹어서 시야가 잘 보이는군.”

지용은 그러면서 신발을 벗고 주머니에서 여송연을 꺼내서 피웠다.

“아무래도 맨정신으로 그 이야기를 듣긴 그래서 말이야…”

“다희는 제 여자입니다.”

더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 구진이 날카롭게 말을 끊었다.

“그저 그 여자를 건드려 볼 생각이시라면 포기하시기 바랍니다. 다희는 제 여자입니다.”

“…뭔 소지나가는 소리를.”

욕지거리를 하면서 지용은 타구에 침을 뱉었다.

“애초에 내가 후견인인데 자네가 뭔 권리로…더더군다나 다희는 자네가 아니라 민시길을 더 좋아하지 않나. 소문이 그렇게 나있던데? 전하께서도 내게 두 배우의 열애설을 물어보실 정도이니.”

구진은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다희는 후견설정이 끝나는 성인식에 나타나지 않았고, 그때 구진이 그녀를 납치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때 민시길이 길에 쓰러진 것을 본 다희가 그에게 부탁해 그때부터 세 사람이 함께 했던 것이다.

납치였지만 정작 납치당한 것은 구진이었다. 
그때 이후로 그의 영혼은 다희에게 걸려 있었다. 납치당할 여자도 아니었고, 납치할 수 있는 여자도 아니었다.

“당신은 그 여자를 잘못 알고 있습니다.”

구진이 차갑게 말했다.

“예전에는 당신하고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재미가 없어지면 당신은 그때 그녀를 버렸듯이 또 버리시겠죠.”

“……”

“저는 그녀를 절대로 버리지 않을 겁니다. 뼈가 드러나서 흉하더라도, 어느 누군가에게 죽음당해 시체만이 제게 돌아와도 전 절대로 그녀를 버리지 않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그 여자의 전부입니다.”

“민시길과 대결해도 말인가?”

“그 친구는…”

노구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독기 어린 눈을 지용에게 한번, 소장에게 한번 보냈다.

“제 상대가 못 됩니다. 설마 덤빈다면 얼마든지 상대해주죠. 죽여버릴 겁니다. 그 여자 앞으로 가는 길을 막는 모든 남자들은 제 손에 죽을 겁니다. 절대로 어느 누구에게도 다희를 제 허락 없이 데려갈 수 없을 겁니다. 그녀는 제 모든 것입니다.”

“하지만…그 친구를 재활시킨 건 자네라던데…그런 배우로 키워놓고도 아깝지 않나?”

“…더 이상 할말 없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려고 왔으니 전 가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지용과 더 이상 대화 나눌 필요도 없다는 듯이 구진은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아니 나가려고 했다.
그때 여소장이 그를 불렀다.

“여보게.”

“……”

노구진은 다시 한번 그들에게 시선을 주었으나, 더 이상 그 눈빛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안개같이 흐릿한 그 시선은 그가 나다희라는 마약에 얼마나 중독되어 있는지는 알려주었다.

“다음 자네 연출작은 수도에서 하는가? 이번 마지막 공연이 내일이지?”

“…한동안은 연출 없을 겁니다.”

구진이 말했다.

“다음 작품도 아직 정해진 거 없습니다. 왕립 극단에 연출가가 저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다음 연출때는 수도에서 한번 보도록 하지. 잘 가게.”

구진이 나간 후 지용이 투덜거렸다.

“저 천한 놈이 나한테 하는 말 들었나? 아무리 잘 나가는거라지만…”

“…자넨 너무 서둘러.”

소장은 느긋하게 호텔 미니바의 맥주를 꺼내면서 말했다.

“급할 거 없지 않나. 더더군다나 그 여자가 지금 와서 자네에게 들러붙으면 오히려 자네만 손해…”

“그 앤 내 재산이야! 내가 키웠네!”

“그 재산, 저 친구가 돌려줄 걸세…얼핏 듣자니 돈 많다더군. 더더군다나 전하의 총애도 받고 있다고…그리고 설사 저 친구 아니래도 저기 저 방에 있는 시길이도 고모 할머니가 따로 챙겨줄 증여재산이 있다고 하니…자넨 손해는 안 볼거야.”

지용은 소장을 쳐다보았다.

“자넨 내 놓을 거 없고?”

“…흐.”

소장이 다희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는 걸 안 지용의 예리한 반응이었다.

“포기가 빠른 건 내 재산이라네.”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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