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경인은 부드럽게 시길의 팔짱을 꼈다. 시길의 잠시 얼굴을 붉혔지만 가만히 있었다. 그는 원래 수줍음을 좀 타는 성격이어서였다. 배우생활을 하면서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오랜 고아생활로 인해서 누군가가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면 마음이 약해지고 했다.
“아버지가 당신을 만나면 정말 좋아하실 거에요. 근데 왜 유랑 배우 생활을 하는 거죠?”
“…유랑 배우는 아니에요.”
그가 수줍게 대답했다.
“어머. 아무리 일류 배우라도 지방까지 돌면 그게 유랑 배우에요. 몰랐어요?”
“……”
그는 그녀가 아무 말이나 하게 내버려두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는 그랬던 것 같았다.
“당신이 연기하는 걸 봤는데.”
“물론 봤겠죠. 자리에 있었을테니까.”
그가 대꾸했다.
“난 설마하니 당신이 그렇게 연기를 잘 하는지 몰랐어요. 하긴 당신 성격대로 연기했을테니 오죽했겠어요? 죽어도 당신은 햄릿은 연기하지 못할 테니까.”
“…말이 심하군요.”
그러면서도 그는 웃었다. 그는 이 작은 아가씨가 예전에 만났을 때부터 좋았다.
“근데 당신이 어째서 여기 있는 거죠? 난 유랑 배우니 그렇다치지만.”
“…아, 유산 상속때문에 와 있었어요. 우리 고모할머니가 여기 사시거든요.어머니 만나고 싶지 않아요? 아, 맞다. 어머니가 당신을 꼭 만나고 싶어해요!”
여경인은 호들갑을 떨면서 극장 거리 지나서 큰길 까지 그를 데리고 갔다. 훌륭하신 했지만 멋있다고는 할 수 없는 씨그램 형태의 호텔이었다.
“아까 전에 본 그 얼굴에 흉터 있는 남자는 배우인가요?”
“…아. 노구진 형을 말하는 거군요.”
경인의 말에 시길이 천천히 말했다.
“노구진? 노구진이라면 왕립 극장의 연출가 아닌가요?그 사람이 여기까지 내려왔다고요? 단순히 지방 공연 연출에?”
“음…실은…”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면서 시길이 천천히 말을 끌었다.
“노형은 다희 누나를 좋아해요.”
“어머!”
경인이 깜짝 놀래는 시늉을 했다.
“나다희! 그 여자를 말하는 건가요?”
“네.”
“그 여자 질이 굉장히 안 좋다고 소문 났던데. 얌전한 아가씨가 아니어서 배우 생활에 뛰어든 거라고 들었어요. 연기도 그다지 잘 하진…”
“…좀 다혈질이긴 하지만 그렇게 나쁜 건 아니에요. 엄…사실 내가 배우를 하는…건 다희..누나 덕분이에요.”
“그 여자가 우리 아버지 친구한테 어떤 망신을 줬는지 모르죠!”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여경인은 열을 냈다.
“글쎄. 그 친구분의 오셔서 하는 말이 어릴 적부터 그렇게 애지중지 키워놨더니, 집을 나가버렸다고! 그리고 청혼하려고 갔더니 개망신을 주더라는거에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그리고 당신은 왜 내가 여기 있는데 그 여자 편을 들고!”
경인의 말에 시길의 당혹감은 느꼈다. 경인의 집안 사람들이 거의 그렇듯, 그들은 결론을 이미 내려놓고 듣는 버릇이 있었다. 이미 경인은 그 여자를 핀셋으로 꼭 집어서 비커 밖으로 끌어내린 것이다.
“왜냐하면…”
시길은 이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말했다.
“아직 나와 당신은 아무 사이도 아니었고, 앞으로도 아닐테니까 그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건…”
순간적으로 그는 통증을 느꼈다. 경인이 뾰족한 하이힐로 그의 발을 찍은 탓이었다. 그는 좀 억울했다.
시길이 그녀에게 뭔가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그녀의 행동은 부당했다.
“어째서 당신하고 내가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거죠? 그리고 왜 그런 여자를 내 앞에서 옹호할 수가 있어!”
그녀는 펄펄 뛰면서 그에게 항의했다.
“아니…실제로…”
“고모할머니가 재산을 분할하신다 해서...그런데 그 재산을 내가 받으려면 당신하고 내가 결혼해야 된다고!”
“에?”
“그리고 요즘 익명의 편지가 나한테 자주 와요. 나다희가 노구진과 결혼하려면 당신과 내가 결혼해야 한다고. 나는 순백의 천사라 순진한 당신을 잘 거둬들여 줄 수 있다는 그런 편지가! 이런 괴편지를 받고도 내가 당신을 데리러가야 한다니!”
“경찰에게는 물어봤나요?”
“물어볼 것도 없어요. 보나마나 그 여자랑 결혼하려고 애가 탄 노구진씨가 나한테 보낸 것일테니까!”
“……”
“의문이 이제 풀렸어요. 그 여자를 좋아한다면 그 여자를 갖기 위해서 무슨 짓인지 못하겠어요.”
여경인은 엘리베이터가 12층에 이르자 그를 데리고 1204호로 갔다. 그녀는 문을 두드렸고 이내 안에서 그녀의 아버지가 나와 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왕립 사관학교를 나와 지금 소장의 위치에 있었다.
“어서오게. 이 사람아. 그동안 뭘 하고 지냈나.”
여소장은 그렇게 말하면서 시길의 등을 두드렸다. 아무래도 막대한 재산이니만큼 이미 안정된 소장에게도 필요한 것이었다.
“아, 예.”
“배우를 한다고.”
“네.”
“아, 집사람하고 이야기 해보겠나?자네하고는 먼 친척이니…그리고 말은 이 아이가 안했겠지만 우린 자네가 연기하는 연극을 꽤 여러번 보았다네. 아내는 자네의 팬이야!”
시길은 귀까지 벌겋게 붉어졌다. 이내 거실에서 사락사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는 소장 부인이 의류에 있어서는 사치를 조금 부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녀가 비단옷을 입고 그 자락을 끌고 오는 것이라는 걸 알아챘다.
“경인이가 누굴 데려왔지?”
알면서도 그런 다는 것을 알았지만 시길은 이내 시침을 뚝 떼고 연기하듯 그녀에게 말했다.
“소장님 사모님께 인사드리겠습니다. 민시길입니다.”
“어머.”
시길을 향한 그녀의 은근한 눈빛에는 귀족적이고 또한 서투르게 보이지 않으려는 상인의 기질이 엿보였다.
“오래간만이네. 시길씨. 잘 있었나요?”
“이거보라니까. 연극을 여러 번 보고도.”
눈치없는 여소장의 말에 민지란은 짜증을 냈다.
“여보!”
“아, 그래그래.”
그제서야 아내의 진심을 알아챈 그는 담배를 피우겠다는 핑계를 대고 자리를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