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버드


나는 시름을 견디지 못하고 무도회장 밖을 나왔다.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골라준 수많은 연인들 중에서 왜 예전에 헤어진 검은새만한 연인은 없는 것일까...
아니, 왕자라는 신분이 그렇게나 대단한 것인가...어머니가 화류계 여자라고 내친 그녀...

"어머, 여기 계시면 안되죠..."

귀에 익은 목소리에 나는 무심코 옆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지난달 헤어졌던 검은새가 상냥한 표정을 지으면서 서 있었다.

"검은 새!"

나는 순간적으로 그녀를 껴안았지만 허공을 스치고 지나간 마음은 너무나 공허했다.
아직도 안은 왈츠 곡들로 가득하지만, 그 안에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아무도 없었다.

검은색...

이미 왕정제는 사라지고 없는 유물... 영국이나 일본은 이미 모든 왕정을 포기했는데, 옛 조선의 잔뿌리인 화령왕국에서는 아직도 왕정제를 고수하고 있다.
한때 식민지였던 것을 기억하고 있기에, 왕족들은 철저한 준비를 거쳐 대통령제를 없애버리고 왕정으로 돌아갔다.
그렇기에 내가 이토록 답답한 것이다. 34의 나이, 아직 아내가 아니, 비가 없다는 사실이 이토록 압박감을 주는 것일 줄이야...

"왕자님 바람을 쐬시는 것도 안 좋습니다. 들어가시죠..."

적자로 겨우 꾸려나가는 소왕국에서 이런 대규모 파티란 얼마나 허망한 짓인가...
신 프랑스 제국에서 구입한 칠천만 프랑의 샹들리에...가 군데군데 채우고, 그나마 돈이 모자라 조명이 부족한 부분은 군색한대로 일본에서 모조품을 가져다가 꾸몄다.
갈라지고 쪼개진 중국 군벌들에게 사서 가지고 온 옛 중국의 모조 예술품으로 꾸민 로비는 그야말로 어설픈 솜씨라 할밖에.

"다른 일이나 하게."

나는 되도록 목소리를 가라앉히면서 시종에게 말했다.

"나는 지금 중요한 생각을 하고 있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저 무슨 일을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그것이 여왕님이 왕자님에게 내리시는 크나큰 뜻입니다."

"내겐 아직 검은새가..."

"...그 여자는 이제 잊으시죠. 돈만 주면 뭐든 하는 여자입니다."

"하지만..."

"...왕자님."

시종이 군색한 표정을 지었다. 이 표정이 나올 때면 뒤따라나오는 말도 명확하다.

"여왕님이 왕자님이 나가시자마자 많이 아프십니다. 이제 들어가시죠...지금도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말이 좀 통한다싶으면 그 다음은 항상 이 방법이다. 과거 식민지 시절, 부잣집 자식들이 자유연애를 하다가 끌려들어가는 방식...그것이 지금의 왕자에게도 통한다니 어처구니 없는 노릇이지만...
적어도 어머니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을 때까지는 참아야 한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더 심통을 부리기로 했다. 나는 발코니 저편에 있는 은색으로 반짝이고 있는 호수를 가리켰다.

"난 항상 이 별궁에 올때마다 기분이 좋아지지."

"황공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제 들어가셔야..."

"저 호수가 있기 때문이야. 마치 루트비히 왕이 있던 노이반슈타인 성 느낌이 나거든."

"저하..."

"백조들이 날아들어 올 땐 정말 황홀한 광경일거야. 그렇지 않나?"

"...백조라..."

"그런데 어째서 저 아름다운 호수가 별궁의 소유가 아닐까? 나는 그게 참 유감스럽네. 자네가 보상담당이었다던데 내 생각엔 이 유치하고 비싸기만한 장식품들 대신 저 호수를 구입하지 않았을까?"

나는 빙빙 돌려서 그를 공격했다.

"...그다지..."

"응?"

시종이 뭐라고 웅얼거렸지만 나는 못 들은 척했다.

"좋지 못한 소문이 있었습니다. 저하..."

"응?"

"저 곳은 별궁에 포함시킬 수 없는 사악한 곳입니다."

"...전설을 믿나?"

걸핏하면 들리는 이야기. 왕족들은 사악한 기운에 휘말리지 않게 항상 궁중 무녀들이 처방하는 호신부를 차고 약재를  먹어야했다. 그리고 사악한 곳에는 발도 들어서는 안되었다.

"저것은 혁명가라고 자칭하는 자의 영지입니다. 귀족이지만, 사악한 것을 좋아해 마법사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곳에는 그의 앙녀라는 처자도 있는데, 오늘 초대받았지만 오지 않았습니다. 오만한 짓이지요."

"사악한 자의 양녀라면서 왜 그녀는 초대를 했나?"

"그녀는..."

시종이 말을 그치기도 전에 푸드득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엄청난 무게와 함께 무언가가 내 가슴팍에 올라와 있었다. 이것은 말 그대로...새. 커다란 새 한마리가 내 가슴팍에 부딪힌 것이다.

"백조?"

백조는 기절한 상태였다. 날개끝이 약간 상했지만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아, 혁명가가 또 날뛰겠습니다."

시종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 투덜거렸다.

"백조구이를 먹고 싶군."

"저하..."

"이걸 주방장에게 굽게 할 순 없나?"

"......"

"난 한번도 먹어본 적이 없어서...먹어보고 싶군."

"저하. 파티 중입니다..."

"파티 중이니 더욱이..."

내 항의에 시종은 항복했다. 하지만 단서를 달았다.

"좋습니다. 저하. 구워드리겠습니다만, 파티에 10분 정도만 참아주시면 구워올리겠습니다. 그동안 백조는 새장에 넣어 왕자님 방에 두겠습니다..."

나는 그제야 마음이 풀려 파티에 참석했다. 아프시다던 어머니는 너무나 멀쩡한 표정으로 파티 마지막까지 즐기다 들어가셨다고 한다. 나는 약 10분 정도 참석하겠다는 약속을 지켰고, 방안의 백조를 구우려고 할 양으로 방에 들어갔다. 멋진 은제 칼과 다이아몬드 박차를 박은 내 승마용 구두가 있는 곳에 그 새가 있었다.
새장 안에 갇힌 백조깃털로. 된 옷을 입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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