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어둠이 걷히고, 새벽의 어슴프레한 빛이 찾아왔을 때 설은 눈을 떴다. 언제 도착했었는지도 기억 나지 않았다. 다만 하선생이 너무 추워했기에 그의 곁에 꼭 붙어 있었던 것은 생각이 날 듯도 했다.
통신소는 아니었다. 하선생은 생각보다 쉽게 쓰러졌고, 그녀는 길이 없는 곳을 눈을 헤치며 그를 질질 끌고 갔다가 중간에 뭔가가 보여 그 속으로 그를 끌고 들어갔다. 어둠속에서 그녀는 그의 호흡이 없어지고 있는 걸 감지하고 옷을 벗고 그를 감쌌다. 별 생각은 없었다. 주저하는 마음이 안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 상황에서는 그 수 밖에 없었다.

"깼소?"

그녀가 옷매무시를 바로 하는 동안, 하선생은 돌아선 채로 말을 건넸다.

"덕분에 살았소. 산전수전 다 겪은 내가 얌전한 모던 걸에게 도움을 받을 줄이야."

"...생각보다는 신사시군요."

그녀의 말에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언제는 내가 안 그랬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설양. 나는 당신에게 그 노트를 보여준 것 외에는 당신에게 신사적으로 대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만행을 생각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까지는 말할 수는 없었다.
자신까지 죽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는 이상하게 선호하는 사람만큼은 말처럼 매몰차게 대하지 못했다.
자신을 감싸준 여자라고 해서 살려둘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정신이 든 후에도 그녀를 살려두었다.
같이 묶여 있던 순간에도 그녀를 버려두고 가지 않았다. 그녀의 칭찬에도 냉담한 반응이었다.
어쩌면 이 사람은 그저 친제국파가 아니라 그저 제국인이 되고 싶은 반도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가 그 통신손가요?"

"음, 그렇소. 나랑 잘 아는 사람이 하는 곳이지. 한때 내 감시원이었던 아베 유키히코가 근무하는 곳이오. 근데 보이질 않는군. 이렇게 근무를 해도 되는 건가?"

"....."

그녀는 할말을 잃고 고개를 돌렸다.

"지금이 몇신지도 모르겠군...가만 있자...아, 여기 라디오가 있군."

통신소의 이곳저곳을 돌아보던 하선생은 라디오 주파수를  맞췄다.
지지지직 소리와 함께 이 말이 흘러나왔다.

[4일후  통감과 함께 장관님이 대륙횡단열차의 종착역에서.. . 예정시각은...]

그 순간, 하선생의 얼굴이 굳어졌다.

"늦었군."

"......"

하선생은 자신도 모르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예정대로라면 자신의 감시하에 열차는 반도에 도착해야 한다.
독립군들이 어설프게 끼어드는 통에 자신의 일은 어그러졌고, 거기에는 이 모던 걸도 한 몫했다.
자신이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것을...

그때 문이 열리고 통신원이 들어왔다.

"오이! 아베!"

그의 부름에 상대편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너무나 명확한 반도어로 그를 내리찍었다.

"여긴, 너희같은 년놈들이 사는 제국이나 반도가 아니니 그 반지르한 아가리 닥쳐!"

그리고 그 뒤를 줄줄이 넝마주이 같은 옷차림을 한 떼의 청년들이 들어왔다.

"아베!"

손발이 묶여서 질질 끌려들어온 것은 하선생이 독립군 시절, 요시찰인으로 분류되어 있을 때 그의 감시인 역을 했던 아베였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이럴 수가..."

정신을 잠시 잃을 뻔한 하선생에게 통신원 옷차림을 한 청년이 냉랭하게 말했다.

"그래도 얼어죽을 것들을 구해주긴 했지만, 네놈들은 그 열차가 반도에 도착할 때까지 여기 있어야겠다. 김대승 대장의 말이 관철될 때까지."

"당신들은..."

"대륙마적독립군이다. 김진좌 대장 밑에 있지."

"김진좌..."

김진좌와 하선생은 한때 같은 연대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로의 운명이 이렇게 바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김진좌 밑에 있다면서 김대승 대장이라니...그 사람은 처음 듣는 사람인데..."

"...반제국놈이 그런 건 알아서 뭐해. 닥쳐!"

하선생은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짐작했다.
김진좌가 하는 일에 반발하는 무리가 아마 따로 다른 대장의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군. 이게 동포애인가..."

흐릿하게 냉소를 날리면서 하선생이 말했다.

"나는 원래 배반자인 몸이지만, 당신네들은 더 웃기는군. 독립을 말하면서 그렇게 분열을..."

쫘악! 하는 소리와 함께 하선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독립군 중 한명이 그의 뺨을 친 것이었다.

"어차피 독립은 되게 되어 있어. 대륙의 각 통신소는 이미 독립군들이 접수했다. 이미 반도의 각 주재소에는 반도인 통장이 다 들어가게 되어 있어. 4일 후 도착하는 그 기차를 탈취한 후,  도착하는 장관 및 관료들을 모두 죽인다..."

"죽인 후엔?"

여전히 냉소를 잊지 않으며 하선생이 물었다.

"그 후엔 독립이다. 이미 제국과 반도가 협의한 결과다. 황제는 어소에서 이미 연합군에게 항복 문서만 읽을 차례고..."

아베가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선생님 어쩌면 좋습니까? 대륙 통신원으로 근무하면 좋다고 하셔서 옮겨 왔더니  이대로 죽게 생겼습니다...가족들은 몽땅 다 저만 믿고 옮겨왔는데 어쩌면 좋습니까."

한숨을 푹 쉬면서 하선생이 말했다.

"별 수 없군. 이보시오. 선생들. 저 사람은. 좀 보내주구려...단지 제국인일뿐 나쁜 짓은 하지 않았으니..."

"네놈은 말할 자격도 없어."

그 중 중심인물-처음에 말을 하던-은 발을 굴렀다.

"제국인 중에 선량한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죽은 제국인일때 뿐이지."

"내가 하나 맞춰볼까?"

하선생이 부은 뺨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너희들은 그 차에 뭔가가 있는지는 알고 있다. 애초에 내가 거기 탑승했다는 것이 너희들 눈에 띄었겠지.
그래서 김진좌도 그 기차를 따라왔던 것이고...기습공격을 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기차를 탈취하진 않았다.
분열은 거기서 시작했겠지. 수상쩍은 기차를 없애버릴 기회를 놓쳤으니...너희 파벌이 앞으로 독립 후 큰 힘을 얻기 위해선 김대승 대장의 도움이 필요했을테고..."

"네가 뭔데 이것저것 들먹거리는거냐. 제국놈들같긴 해서 두긴 했는데..."

하선생은 그제사 아차했다.
상대들이 자신의 정체를 알고 감금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네 이름을 말해라!"

그가 으르렁댔다.

"네 이름이 뭐냐! 어차피 계획을 알게 되었으니 죽이는 수 밖에 없다! 죽기 전에 네 이름은 대고 죽어라! 이름이 뭐냐!"

하선생은 천천히 자신의 찢어진 옷을 바라보았다. 한두의 나달나달한 흰 한복.
그리고 유창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제국어와 반도어.

"내 이름은...하우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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