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군들은 승객들의 소지품을 검사했다. 그리고 몇명의 관리들이 눈에 띄자 그들을 꽁꽁 묶었다.
독립군 중 하나라 자신을 소개했던 우정은 한두와 설을 한데 묶었다. 그리고 아까 전까지는 꿈에도 못 꾸었을 신체접촉을 설에게 시도하려 했다. 그러나...
"제 성격을 아셨을텐데요."
냉담한 어조로 그녀는 구두로 그의 발을 지그시 밟았다.
"...윽. 이 여자가."
우정은 짜증을 내다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 년하고 이 놈을 한데 죽여버리면 안될까요. 찾을 사람도 없을 듯 한데."
"아니, 아까 전에 새로 뽑힌 중부 대장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습격한 부대의 대장이 실쭉한 어조로 대꾸했다.
"어찌 된 일인지 이 기차를 사수하라 했다는군. 다행히 이 눈보라에 제국군이 여기에 당도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고...그리고 밀정 말로는 이 기차에 뭔가 중요한 게 있다는게요. 그리고 중부 대장이. 특별히 만나야 할 여인이 있다고..."
"이 기차 안에 뭐가 있겠습니까? 고작해봤자 석탄일 뿐입니다. 제가 이미 조사해놨다니까요."
"어허. 하라면 하라는대로 하시죠. 패잔병 주제에."
아까 전부터 계속 튀는, 그리고 옷은 꾀죄죄하게 입었지만 말투는 엘리트의 그것임이 못마땅한 부대원이 비꼬았다.
"뭣! 내가 패잔병이라고!"
"딱 보기에 그리 생겼구만. 자기 부대도 못 찾아가고 그게 무슨 짓이오? 아까 전에 저 아가씨 치근덕거린 것도 그렇고...사통할 만한 아가씨도 아니구만...오히려 자기가 건드리려다가 괜히 시비거는 거 아닌가 모르겠소."
설은 묶인 상태에서도 로자리오를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첫 순간의 냉담함은 아니었다.비록 위선적인 우정에 의해서 극도로 몰렸더라도 그녀는 우정을 진심으로 미워하지는 않았다.
우정은 오히려 그녀를 백명쪽으로 몰아주는 발구름판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그가 오히려 그런 순간이 오면 포기하리라는 생각을 했다. 현실성이 없긴 했지만 우정의 행동도 현실성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마치 검은 종이에서 뜯어낸 그림자와 같은 것이었다. 검은 몸체의 그림자는 몸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처럼...그는 제국주의의 실체로 활동하면서 진짜 꼭두각시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도와드리려 했다가 오히려 일을 그르쳤군요. 죄송합니다."
한두가 조용하게 말했다.
"...아니에요. 천주님이 도와주실 겁니다."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여긴 너무 넓고, 눈보라까지 쳐서 그 천주도 볼 수 없을 겝니다."
"포기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을 문제는 없을 거에요."
그녀는 자신을 설득하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저는 지금껏 그렇게 믿지 않았지만 이젠 믿을 수 있겠어요. 저 사람은 애초부터 그런 악질이 아니었을테니까요."
그녀는 그에게서 받았던 그 편지글들을 생각했다.
버리지 않고 모아둔 그 편지들...
오로지 하나만을 갈망하던 남자가 선택한 방법...
그것의 총체가 바로 그 글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가 탐하는 것은 그저 여자가 아니라...
"만약의 경우에..."
설은 목소리를 낮춰서 한두에게 말했다.
"도망치실 수 있다면 꼭 제 약혼자에게 말해주세요. 백명. 당신이 부탁하는 걸 위해서라면 난 여기서 죽어도 상관없으니, 억지로 날 구할 생각은 하지 말아달라고요. 그리고 반도의 국민들을 위해서 꼭 성공해달라고. 그렇게 전해주세요."
그리고 그녀는 묶여있던 끈을 숨겨놓았던 칼로 끊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한두는 기차에서 튕겨나오듯 달려서. 독립군 중 한명을 쓰러뜨리고 그가 타고 있던 말을 집어타고 달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