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3등칸 승객들은 따로 챙겨먹을 저녁조차 없었다. 말없이 우동가게에서 돌아온 한두와 우정은 1등칸에 앉아 있어도 딱히 할 일이 없었기에 따로 따로 움직였다. 우정은 같이 우동가게에서 저녁을 먹은 노부인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우정의 열렬한 팬이었다! 기차에 탄 순간부터 지금껏 계속 반대 이야기만 들어온 우정에게는 행복한 일이었다. 우정이 얼굴이 살짝 풀린 채로 노부인과 대화를 나누던 순간에, 한두는 메스꺼운 우정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 3등칸쪽으로 걸어갔다. 거기에는 우동가게의 우동값을 우정이 내주었다는 짜증스러운 현실도 있었다.
"어디 가세요?"
마침 2등칸쪽의 문으로 올라오던 홍설이 물었다.
"제 자리로 돌아가려고요..."
그의 말에 홍설이 살짝 얼굴을 붉혔다.
"저도 좀 따라가도 괜찮을까요?"
한두는 그녀의 말에서 뒷말을 읽을 수 있었다.
-한번도 3등칸에 가본 적이 없어서요...-
그는 주저했다.
"거긴 지저분하고..."
뒷말을 또 이번에는 홍설이 읽었다.
-단순히 구경거리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에라 모르겠다."
한두는 이내 사태를 정리했다.
"가보십시다. 그리고 제 자리가 아직 비어있으면 전 제 자리로 돌아가렵니다. 감시원인 하선생이 잠시 정신을 놓았으니, 이젠 제 자리로 가도 별 문제는 안되겠죠."
두 사람은 천천히 열차칸을 지나갔다. 그럭저럭 점잖은 기모노를 입은 제국인들과, 역시 제국인들과 별 차이가 안 나는 옷을 입은 반도인들-그들은 누가 봐도 제국인 같았으나, 억양에서나 사용하는 언어에서 반도인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대부분은 그럭저럭 살만한 인상이었고, 이민온 엘리트라는 인상이 강했다.
이등칸을 지나 삼등칸으로 왔을 때 그들은 한때 대영제국이 보여주었던 한 호화여객선의 삼등칸보다 더 비참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설야차, 설녀를 연상시키는 하얀 옷들의 움직임.
누덕누덕 기운 하얀 옷의 그들은 머리조차 하얗게 새어버린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지저분하다기보다는..."
홍설이 반도어로 말했다. 차마 제국어로 이야기할 수 없어서였다.
"...그렇군요."
말을 다 듣지 않아도 아는 것처럼 한두가 자연스럽게 반도어로 대꾸했다.
"여긴 아직...제국도 아니고, 대륙도 아니고, 반도도 아니니까요. 여긴 본래 제자리니, 돌아가시지요."
한두는 이내 자신의 자리를 찾았고, 몇번의 실랑이 끝에 자리를 차지했다.
그 순간 말하는 반도어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반도어 못 하시지 않았었나요?"
그녀의 말에 한두가 대꾸했다.
"다 하는 건 아니지만 기본적인 건 합니다. 자리차지 할 수 있을 정도로는요. 작가 선생이 안쓰럽더군요. 왜 그렇게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건지."
지저분하진 않았지만 슬펐어요...라는 그녀의 말을 받아친 한두에게 그녀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녀의 약혼자는 바로 그런 이들을 위해서 일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답장은...
"하선생이 좀 치근덕대긴 하겠습니다만..."
한두는 그녀를 자신도 모르게 달래고 있었다.
"그 선생도 자기 이름값이 있으니 그렇게 귀찮게는 안굴 겁니다. 그러니까...삼등칸의 현실은 잊어버리시고, 돌아가세요. 얼핏 옆에서 듣자니 약혼자분도 계신 모양이던데...그 약혼자도 잘 나가는 집안 자제분 아닙니까?"
그제서야 그녀는 자신이 손에 들고 있는 편지를 깨달았다. 약 3달 전에 대륙의 한 료칸에서 보낸 편지의 답장이었다.
-유키. 이 말을 하는 나를 용서해주기 바라오. 우리의 이 약혼은 잘못 되었소. 나도 철없던 시절에 그대를 만나 단 하루만에 10년만 있으면 그대와 결혼하게 되리라 언약했소. 하지만 유키, 그때의 나는 대륙에서 제국인들과 대치하지 않는, 그저 연약한 지식인에 불과했소. 아버지는 내게 집안을 나가라 하셨고, 지금 나는 당신이 알고 있는 대로 대륙에 있소. 내게는 동포들이 있고, 그대에게는 아버지의 집이 남아있소. 그대를 맞이한다는 것은 동포들을 배반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오. 나는 아직도 그대를 진정으로 사랑하오. 그러나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이 몸이 그대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소...-
그녀는 그 답장을 받자마자 울고 말았다. 단 한번의 사랑. 십년전 사교계의 어린 여자아이로 섰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꺾여온 적 없던 그녀의 마음이 꺾인 것이었다.
"저...잠시 있어도 괜찮을까요?"
그녀의 말에 한두가 그녀의 눈시울이 약간 젖은 것을 보고 아니라고 하려다가 그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김선생님."
그는 그녀에게 자기 자리를 내어주고 바닥에 대충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제 약혼자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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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1등칸에서 3등칸 가는 귀부인 이미지-영화 타이타닉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