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정은 얼어붙은 바깥의 광경을 보고 있었다. 얼음으로 가득 찬 세계.
대륙과 대립하는 또 다른 대륙, 뭐 지식인들이야 그 나라를 하얀 대륙의 제국이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눈이 난분분하게 날리고 있었다. 어이없을 지경으로 빠져드는 그 세계.
"물 좀 드시겠소?"
옆에서 콜록거리는 청년에게 물었지만, 청년은 그저 고개를 저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또 옆좌석에서는 그녀가 등을 켜놓고 뭔가를 끼적이고 있었다. 말투나 태도로 봐서는 소설가를 꿈꾸는 것 같진 않았다. 그저 소녀 취향의 편지겠지.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저 여자에게 맘을 주면 안돼.
저런 여자는 꼭 결혼을 해야 맘을 주지...
결혼광고를 떠올리면서 그는 절레절레 마음의 고개까지 흔드는 것이었다.
[고 홍기언 백작의 딸. 홍설. 나이 18세. 성격 좋음. 가난하여 부유한 남자와 결혼해야 함. 재취자리도 가능함.]
그 결혼광고는 아마 본인이 낸 것이 아니라 그 유명한 계모가 낸 것일게다.
아마 저 아가씨는 학교에서 공부중이었을테니 몰랐겠지만, 그 계모는 행실이 좋지 않기로도 유명했다.
고 홍기언 백작을 꼬여낸 것도 그 타고난 미모와 목소리때문이라지 않나.
어딘가의 믿지 못할 이야기를 믿는다면 그녀는 제국에서 게이샤로 활동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게 몇년 전의 이야기이니, 아마 대륙에서 반도로 도착하는 순간, 그녀의 계모에게 두둑한 돈을 건넨 어떤 남자의 아내가 되어버릴 것이다. 태도로보나 뭘로 보나 홍설은 냉랭하기 그지 없지만 말이다.
"나쁜 마음 먹으면 안됩니다."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옆자리의 청년이 제국어로 말을 걸었다. 아까전부터 말도 없이 뭔 책만 뒤적뒤적하던 인간이...
"뭐라고?"
"난 당신 압니다. 하우정이죠?"
"......"
"엿듣지 말게."
"오, 엿들은 건 아닙니다. 당신 유명하니까요."
유창한 제국어이긴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딱딱했다. 책으로 배우고 익힌 제국어라는 느낌이 났다.
"그래서, 뭐?"
"음, 당신 유명하던데요. 여자들한테. 아까 전에 역에서 역무원들이 떠드는 걸 들었는데 여자들을 따라다니는 게 취미라고."
이 정체불명의 탑승자는 그를 약올리는 게 재미있는지 빙글빙글 웃어댔다. 지금 옆좌석의 홍설이 성모송을 읊고 있으니 못 들으니 다행이었다.
"...그건 다른 남자들도 하는 일이지. 대수로울 거 없네. 자넨 진심으로 사랑해본 적이 없나보군."
"아니, 내가 들은 건."
내가 느낀 이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까...? 하는 표정으로 한두는 생각하다가 이내 말을 이었다.
"당신은 당신의 여자에 대한 느낌을 일일이 기록하고 여자한테 읽히게 한다고 들었거든요. 꼭 제국의 톨스토이라 불리는 당신별명에 걸맞게."
"....."
그건 맞는 말이었기에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변태같은데. 그건? 아, 이 제국어가 맞는 건가? 헨타이?"
조롱조의 말에 하우정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의 주전자같이 붉어졌다.
"제국어 할 줄 알잖나. 모르는 척하지 말게. 위선떨지도 말고."
"위선? 그럼 진심인건가요?"
"...아직 그 정도의 감정은 아니야. 하지만 자네도 알아야 해. 저런 신여성이 결혼해서 갇혀 있기만 하면 뭘 한단 말인가. 그 전에 가슴이 뛰는 사랑의 감정 정도는..."
거기서 하우정은 멈췄다. 그렇다. 그녀에게 연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반지는 봤지만 그렇게 진심일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여자가 편지를 쓴다면 그게 무엇때문이란 말인가.
홍기언 백작의 무남독녀 딸이, 계모를 위해서 저렇게 글을 쓸리는 없고...그렇다면 저 여자는...
나와 같은 부류인것이다.
한없이 외롭고 정을 갈구하는 그런 인간.
하우정은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진심으로 자신이 애정을 갈구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처음 깨달은 것처럼.
진심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저 여자는 사랑을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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