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선생은 여자에게 말붙이기가 이때만큼 힘들어보기도 처음이었다. 거의 쌀쌀맞은 태도로 방비하는 탓에 중간에 재갈물린 청년 핑계로 말을 붙이긴 했지만, 청년측에서 별다른 말을 할지는 또 다른 문제였다.
그는 섬언어와 대륙언어에도 좀 밝은 편이었지만 재갈이 벗겨진 상태에서 청년이 떠들어대는 말을 듣고는 대화를 포기하기로 했다. 그는 글쟁이라, 표준어에는 항상 밝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 뿐이고, 사투리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광북 사투리군요."

그녀가 듣고 단번에 맞추었다.

"하지만 저한테 하는 말은 아닌데요?"

"...뭐라고 하는 겁니까?""

"그럼 이 분이 절 불렀다는 건 거짓말이었군요."

그녀의 눈이 엄해졌다. 평소에는 상냥한 눈웃음을 칠 것 같은 눈이, 무표정하다 못해 냉랭해졌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때의 그 눈이었다.

"아니, 제가..."

"%%^^^^^^$$##@@!"

청년은 계속 대륙어로 떠들고 있었다. 잠시 그녀를 보고 표정이 시무룩해지긴 했지만, 어쨌거나 이 청년은 멈출 생각이 없는 게 분명했다.

"섬언어에는 밝으시지요?"

그녀가 하선생에게 물었다.

"사투리만 아니,  그러니까 표준말만 쓰면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김한두에게 말했다.

"지금 간이역이니 화장실을 다녀오셔도 되겠어요.화장실은 저 바깥 왼쪽이에요.."

유창한 섬언어에 하선생은 아득해졌다.
단순히 화장실 가고 싶다는 말이었단 말인가!

백작의 영애는 묶여있는 한두를 풀어주었다. 하선생은 무심코 그 거친 끈을 풀어내는 그녀의 손을 살짝 건드리고 말았다. 그녀는 뭐가 묻은 것처럼 손을 닦아냈다.

"감사합니다."

그의 말에 그녀가 다시 대답했다.

"재량을 맡으셨으니, 저 분 잘 챙겨 주셔요. 옷차림을 보니 동포분인 것 같은데요."

"아, 반도인이군요."

"그런 것 같네요. 선량해보이는 분인데 어째서 폭행범으로 몰렸을까요."

"대륙 사람들의 비난에 발끈했나봅니다. 반도인이 원래 속이 작지 않습니까."

"하선생님이라고 하셨죠. 대륙일보에도 글을 실으시는 분이시라면 제가 아는 한, 하우정 선생님이신것 같은데. 맞나요?"

그녀의 말에 하선생은 잠시 반색했다가 이내 다시 시무룩해졌다.
그 말에 비난이 담겨있음을 직감했던 탓이다.

"반도인은 지금과 같은 상황에 처한 것을 스스로 반성해야 한다. 섬의 도움과 대륙의 도움없이는 자립이 불가능한 민족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낭랑한 반도어로 암송했다.

"반정 하우정 씀."

그녀는 또박또박하게 하우정의 필명을 읊으면서 그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반도어를 못하는 반도인, 표준어 구사는 할 수 있지만 넋은 반도인이 아닌 문학인, 그리고..."

잠시 말끝을 흐리던 그녀가 말했다.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의. 재산으로 공부하는 반도인 백작 영애. 참 어울리는 사람들이네요."

그말에 하우정은 그제야 얼마 전 대륙일보에 난 혼인광고를 기억해냈다.
그녀의 계모가 낸 그녀의 혼인광고.
나이 18세.
이름은 홍설.
이제 여자학교를 졸업함. 

하선생은 알았다.
그 눈이 수심에 가득찬 이유를.

결혼하고 싶지 않은 거로군. 뭐, 흔히 있는 일이지.

그는 그녀에게 이제 관심을 가지지 않기로 했다. 정곡을 찔린 탓이었다.
그 말로만 따지면 그녀와 그는 극과 극인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그가 책임을 떠맡은 청년때문에 앞으로도 그녀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는것이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하우정은 청년, 김한두가 섬언어를 할 줄 안다는 걸 들었지만 충격이 큰 나머지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김한두가 5시간 후 섬언어로 떠들 때까지 홍설에게 계속 통역을 부탁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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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정 하우정은 모델이 이광수 선생입니다...
그리고 김한두는 모델이 여러명인데, 우선 생각나는 건 순수문학계의 어느 거장님이 쓰신(아마도 현진건님이었던듯.)일본말도 할 줄 알고, 중국말도 할 줄 알고, 한국말도 드문드문 섞어쓰는 고향 잃은 한국인 이야기에서 조금 따왔습니다. 불행히도 한두는 한국말을 할 줄 모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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