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유명한 바람둥이이기도 했다. 그의 밝은 면에 끌린 여자들은 마치 부나비처럼 그에게 접근했다가 불에 살라지는 것처럼 고통 받고 사라져갔다.
남자는 처음에는 죄책감을 가졌다. 그러다가 점점 그 죄책감이 줄어들면서 나중엔 그 모든 것을 자신을 위한 창작의 재료로 삼기 시작했다. 누가 뭐래도 그는 소설가였으니까.
그는 일기를 썼다. 모든 여자들이 그의 일기의 육체였으며, 영혼이었다.

"원두커피 하시겠습니까?"

그는 역사에 들러 여자들에게 커피를 돌렸다. 커피가 뭔지 알지도 모르는 어린아이들에게도 몇잔 주었다.
어차피 상류층의 하녀로 들어가게 되면 싫어도 이 맛을 알아야 하리라.

"감사합니다."

냉랭한 표정의 여학생이 그나마 좀 풀린 태도로 대꾸했다. 노부인은 뭐라고 수다를 떨었지만 남자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하얀 케이크 모양의 역사에서 여자들은 아까 전의 긴장이 풀린 듯 다들 유쾌해 보였다. 그녀 조차도.
그녀의 귓바퀴끝에서 분홍빛이 살짝 도드라졌다.
발그레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남자는 생각했다. 생각보다는 손에 넣기 쉬울지도 모른다고.

"대륙끝부터 끝까지 다들 힘드시겠습니다.저야 일하러 가는 거지만."

그가 툭 던진 말에 노부인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대륙끝 병원에서 행방불명된 남편을 진료하고 있다고 해서 가는 길이다. 별 할 일도 없으면서 집을 나간 남편때문에 이만저만 고생을 한 게 아닌데, 이젠 별 걸로 속을 다 썩인다. 면서. 
여자는 별 말이 없었다.
남자는 잠시 그녀의 손을 보았다. 손 가운데에 낀 가락지. 그제서야 그녀가 누군가의 연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그의 정복욕을 자극했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손목에 찬 로자리오때문일지도...

그때 역장이 돌아와 그들에게 기차를 정비를 다했으며, 이젠 출발할 시간이라고 알려주었다.
남자는 그녀를 부축하는 대신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노부인을 부축했다. 그녀를 직접 공략하는 것보다는 그녀에게 호감을 사는 것이 먼저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경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로서는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알고 그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잘 모르기때문에 그냥 반사적으로 하는 행동일 뿐이었다.

열차는 다시 출발했다. 부서진 유리는 갈아끼운 상태였다. 그리고 그녀는 아까 전에 그랬듯 다시 한 점을 응시했다.



그녀는 몽상하고 있었다. 그녀의 약혼자가 자신을 구하러 돌아올 날을.꿈꾸었다.
계모는 그녀에게 남겨진 유산을 독식하고 있었다. 돌아가게 되면. 이젠 모두 끝이었다.

"아, 언제 오시나요..."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원장수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호사다마라고. 마냥 조심해야 한단다.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순탄치가 않아."

약혼자는 어린 시절 단 한번 보았을 뿐이었다. 그녀보다 10살이나 많은 그는 대륙에서 유학중이었다.
얼핏 듣기로,  의협심이 강해서 대륙에서 많은 활약을 하고 있다고...
계모는 편지로 그는 위험한 사람이니, 그를 포기하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이 나으리라 했다.
하지만...결국 날이 다가왔다.
그녀가 대륙 횡단 열차를 갈아타고 반도로 돌아가는 날. 그녀는 약혼자와 결혼할 것이다.
그전까지는 그저 성모를 바랄 뿐이었다.
그녀는 아까 전까지 썼던 편지를 덜컹거리는 기차에서 다시 쓰기 시작했다.

[그분이 도착하면 바로 식을 올리려고 해요. 어머니...큰 돈이 드는 건. 아니니까. 그리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되어요. 그분으로부터 연락은 왔나요?]

 그녀가 그렇게 쓰고 있는 동안 열차는 또 다른 정거장을 약 45km 남긴 참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김한두라는 사나이가 열차의 3등칸 표를 막 끊은 참이었다. 그는 반도의 혁명가의 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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