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어머니.
지금 방금 열차를 탔어요. 보내주신 용돈은 잘 보관하고 있어요. 도통 쓸 일이 없거든요. 수녀원에서 모든 걸 다 제공해줘요. 그러니까 어머니, 너무 섭섭해하지 마시고...


편지 쓰는 중간 잠시 펜이 멈췄다. 기차가 출발하려면 멀었는데,  갑자기 기차가 움직인 것이다.
사고일까? 그녀는 잠시 생각했으나 이내 다시 펜을 움직였다.

"마적단?"

마적단이건 뭐건 상관없다는 투로 펜을 놀리는 그녀를 왼쪽편에서 주의깊게 보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그녀보다 먼저. 대륙횡단 열차를 탄 승객으로, 반도에서는 주목받고 있는 유명한 소설가였다.
지금이라면야 소설가가 유명할 일도 없으며, 각종 선전광고에 나올 일도 드물지만-아, 책광고라면 다르겠지만-그때만 해도 반도의 소설가들의 아내가 무엇을 했다던가, 집관리는 어떻게 한다던가, 좋아하는 과자나 과일이 무엇이라던가. 하는 소소한 이야기들이 화제가 될 때였다.

밖에서 화염이 일어나고, 총탄이 쏟아지는 와중에서도 그 두 사람의 행동만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침묵속에서 떠돌았다.

남자는 여자를, 그녀의 어깨를 집중적으로 보았고, 여자는 한 점만을. 그러니까 자신의 단 하나의 구주인 예수와 성모만을 응시했다. 그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하나의 여린 빛을.
그리고. 문이 열렸다.

"신사숙녀분들께 잠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반도의 괴도들이 마적떼로 위장해서 이 기차를 탈취하려 했습니다. 다행히 저희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총성이 울렸다.

탕.

남자가 보기에는 참으로 운이 나쁘게도 그 여자는 안내원의 바로 뒤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핏, 하는 마찰음이 울리면서 안내원의 이마에 피가 흘러내렸다.그리고 안내원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 안듯이 하면서 무너져갔다.
그리고 남자는 이제껏 헤쳐왔던 아수라장을 지나왔듯이 자연스럽게 육혈포를 꺼냈다.

"이럴 필요는 없을테지만."

건조한 음성으로 남자는 안내원의 시체위에 아까전까지 두르고 있었을-그녀는 관심도 없는- 얇은 담요를 던졌다. 그리고 또 다른 담요로 그녀의 시야를 가리며 말했다.

"조금만 눈감고 있으면 될 겁니다. 아가씨가 보기에는 험한 광경이죠."

그러나 여자는 냉랭하게 대꾸했다.

"고맙습니다만, 그다지..."

"......"

남자는 육혈포를 아까 전에 깨진 유리창쪽으로 발포했다.많이 쏠 필요조차 없었다. 단 두 발.
독립군의 대장은 싸하게 한번 그를 노려보고는 부하들을 수습하여 도망갔다.

"끝났군요.  이제 벗으셔도 됩니다."

남자는 그녀에게 씌웠던 담요를 벗겨냈다.  회색 교복.
수녀원 부설학교에 다니는 것을 드러내는 그 회색 교복.
대륙 저 어느 구석에 있는 사립 여자학교겠지.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웬만한 부르주아 학교. 뺨치는 군.

"고맙습니다."

냉랭한 하지만, 약간 물기어린 눈동자가 그의 시선을 피하듯 대답했다.

"아아, 하 선생님 아니십니까."

안내원의 시체가 급하게 치워지고, 비상이 걸린 기차역으로 역장이 다가왔다.

"이 분이 타셨으니 이. 정도지...아아,  정말 큰일날 뻔 하셨습니다.아니,정말 다행입니다. 대륙의 보배인 선생을 잃었다면 저희는 지금쯤..."

"...아, 뭐 그리 큰 일은 아니었지요."

"김진좌가 또 벌인 일 아니겠습니까.  그 놈이 인젠 하다하다 대륙횡단 열차까지 털 줄이야..."

"아들을 못 만난 스트레스를 그런데다 푸는 가 봅니다."


하선생은 농조로 그렇게 말을 붙였지만.  역장은 기겁을 했다.

"선생님. 그런 말씀을! 설마하니 대륙일보에다가 정말 그렇게 쓰시면..."

"...하하,  농담입니다."

타고난 변절자. 혀가 매끄럽게 돌아가는 반동분자.
후에 이렇게 불리는 하선생이었지만, 지금은 그 태도야 어떻건 대륙에 이민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 대륙일보에서 파견한 기자선생이었다.
지금이야 소설가가 기자를 하는 일은 거의 없지만, 그때야 소설가가 더 대접받던 시대이니까.

"그런데 이상한 점은."

존경하는 하선생을 만나서인지 역장의 말이 좀 길어지고 있었다.

"어째서 김진좌는 선생님이 타신 기차만 골라서 따라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저 처럼 골수팬도 아닐텐데 말입니다."

"하하. 뭐 그럴 수도 있는 법이겠죠.  그나저나 역장님, 기차가 지금 출발하는 건 무리입니까?"

역장을 깨우치며 하선생은 옆 좌석에 눈을 주었다. 여전히 여자는 육혈포가 뚫어버린 창의. 빛살만 보고 있었다.
한점. 응시.
그것은 후에 하선생이 그녀에게서 빼앗으려고 했던 그 시야. 냉정한 침묵.
그것이었다.

"저희같은 남자야 상관없지만,  여자분들에게는 충격이 클 듯 한데요..."

"아, 그거라면...상부로부터의 지시를 기다려야..."

하선생은 빙긋 웃었다.

"만약 움직일 수 없다면...역사에 숙녀분들을 쉬게 해드려도 될 것 같은데요."

그의 말에 역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역장의 지시에 따라 노부인 2명, 하녀로 가는 어린아이 3명, 그리고 ...그녀.
그녀가 일어서려 하자 그가 손을 내밀었다.. 반드르르하고 부드러운 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손을 뿌리쳤다.

"혼자 일어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쌩하게 일어나서 돌아가버리는 그녀를 보고 그가 중얼거렸다.

"손에 넣기에는. 너무 사나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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