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막 태어났을 때 그 남자는 뻣뻣한 얼굴로 고보졸업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녀가 걸어다니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학사모를 쓰고 멋지게 걸어다니고 있었다. 비록 시대가 옛날이었어도 그는 흑백사진 속에서나 칼라사진속에서나 변함없이 멋있었다.

"일기를 꼬박꼬박 써야지."

그녀는 손녀가 가지고 온 노트를 보고 타박했다.

"하지만 쓸 말이 하나도 없는걸요."

손녀딸이 투덜거렸다. 딸기잼처럼 달콤하게 붉은 입술이 뱉은 말치고는 무미건조한 말이었다.
투정이라기에도 달콤함이 부족했고, 무미건조한 귀찮음이었다면 그건 그 입술에서 읊어지는 게 아까울 정도의 말이었다.

"쓸말이 하나도 없다니."

할머니가 싱긋 웃었다.
늙었다고 해서 기세가 죽은 것은 아닌, 아직도 인간적인 성숙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부드러운 입매.
그리고 고양이처럼 번적이는 갈색의 약간 작은 동공.

"인생으로 일기를 쓰는 거야. 지루할 틈이 조금도 없지."

그녀는 입술을 오므리고는 잠시 창을 바라보았다. 그 창에 옛날의 자신의 반려가 서 있는 것처럼.

"이렇게 상상해보렴. 오늘 하루가 막 사랑이 시작된 때이고, 그 사람과 이어질 수 있는 방법이 편지밖에 없다면...
나는 과연 어떡할까? 편지가 전해지지 않으면?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와 나를 떼어놓으려고 한다면?"

만약에.
그녀는 거기에 방점을 찍었다.
그리고 여기 그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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