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그 여자를 만나지 않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대학 도서관 장식돌 위를 걸어내리고 있었다. 모든 여자가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사회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있는 아버지를 둔 여자는 그토록 오만한 것일까.
그것이 아버지의 후광일뿐, 자기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을 그 여자는 진정으로 모르고 있는 것일까.
아니, 애초에 그런 여자에게 반한 자기 자신의 잘못이리라.

처음에 그녀는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솜털 보송한 뽀오얀 목덜미,싱싱한 분홍빛의 귓불. 한때는 그것이 신이 바다에 두려다가 잠시 잊고 그녀의 귀에 붙였으리라 생각하면서 얼마나 만지작거렸던가.
하지만 그게 다 옛날 이야기였다. 그의 사랑에 같은 양의 열정을 보여주던 그녀가 점점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게 되자 얼마나 오만해졌던가.

그 조그마한 조개의 귓불이, 그 앙증맞은 치아가 내뱉는 말이.
그를 점점 더 질리게 하고 말았다.
물론 그녀측에서 먼저 찼으니, 그와 그녀의 사이를 알고 있는 동문들이나 그 나이많은 교수들에게 동정섞인 조롱을 피할 수가 없을 터이지만...

이번에 그녀와 그가 헤어진 이유는 명백했다. 자리는 하나밖에 없었고, 그 자리의 후보자는 바로 그와 그녀였다.

"당신이 포기해 줄 수 없을까요?"

그녀는 그의 예산에 맞춰 가게 된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뜬금없이 이 말을 던졌다.

"무슨 말이야.  그게."

그때는 명단도 나오기 전이었기에 그는 그녀가 거기에 응시한 건지도 모르고 있었다. 아니 어렴풋이는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결혼을 주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직장에는 별 관심이 없다고 생각해왔다.

"제이 대학에서 자리가 났다면서요. 나도 거기 응모했으니까..."

"어이, 거긴 당신 실적으로는 무리 아냐? 당신은 나랑 결혼할 생각 아니었어?  그럼 결혼만..."

"결혼은 다른 사람이랑 할 거에요. 당신은 너무 가난하니까."

언젠가 그 소리를 듣고 말거라고 여동기들은 충고했지만 그는 그 나름대로 고집이 있었다.
그녀는 절대 그런 말을 할리가 없을 거라는...

"뭐야.  그럼 나는 엔조이 상대였던거야? 당신 정말...""

"내가 포기해면 뭐가 달라지는데?"

"아버지가 당신 자리를 따로 마련해주실거에요?물론 결혼은 안 하겠지만."

"포기 안 해.그러니까 당신도 헛 꿈 그만 둬. 당신 자리는 없으니까."

그렇게 쏘아붙이고  자리에서 일어나긴 했지만 그도 답답해졌다.
실력만으로 이길 자신은 있었지만 그녀도 그렇게 멍청한 여자는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 돌아와 그는 끙끙 앓았다. 그녀 얼굴이 거울에 비쳐  면접날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다..
그런 상태였으니 결과가 좋을 리 만무했다.
결국 그녀는 붙었고, 그는 떨어졌다.


사람은 결국 앙숙과 비슷해지는 걸까.
그는 대학의 도서관 계단을 밟으면서 이번에 올라온 조교수 후보들을 생각했다.
그때와 같았다. 조교수 자리에 남자 한명, 여자 한명의 후보.
그리고 연줄이 있는 남자와 없는 여자.
실력은 여자측이 있고 남자는 실력보다는 사회성이 더 좋은 것 같았다. 다만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를 강조하는 것이 조금은 걱정되긴 했다. 그래도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연줄이 있는 성격 좋은 사람이라면 앞으로 학과장 자리를 노리는 그에게도 보탬이 될테니까.


미워하던 그녀와는 예전에 화해한 상태였다. 그녀의 남편이 이 대학의 다른 과 교수기도 했고, 이제 옛날 일을 곱씹을 정도의 미움도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녀도 그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 내심 찝찝했던 것인지 그가 진심으로 그 자리를 그녀에게 넘긴 것이라 착각하고. 자신의 아버지에게 부탁해 지금의 자리의 토대를 만들어준 것이었다.
후에 그걸 알게 된 그는 위자료냐....라면서. 씁쓸해 하긴 했지만 내심 안도했다.

이제 남은 건 둘 중 누구를 붙이느냐...다.
그는 씁쓸한 감정은 가지지도 않았다. 아까 전에 마신 하이네켄 맥주의 진미를 느끼면서 뒹굴거리면서 케케묵은 형사드라마의 결말을 떠올릴 뿐이었다.

그때 형사가 말했다.
멈춰라.  정의가 널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부자인 범죄자가 말했다.
무슨 소리. 돈은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다.

그는 그 대사를 웅얼거렸다.밤 하늘, 구름에 가려 별들이 어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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