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를 구겨쥔 그는 마치 잘 삶은 홍당무같았다.

"잡았어!"

"뭘 잡아. 파리?"

그의 구겨진 중절모를 보면서 나는 한가롭게 타자기를 두드렸다. 빵굽는 타자기라고? 그야말로 내 타자기에 걸맞는 말이다.

"신비의 미식가. 도르메를 찾았단 말이지. 특종 아닌가? 미슐랭 가이드보다 더 정확한 혀를 가진."

"그거 신기할 거 없는 일인데?"

"응? 자넨 도르메의 정체를 옛날부터 알았단 말인가?"

"...자네가 이제껏 수집한 미식가 명단이라도 불러 줄까? 그리고 방해하지 말아주겠나?난 지금 운명적인 마지막 페이지를 쓰고 있..."

하여간 저 밑 건물에 콩소메 수프옆에서 게걸스럽게 콩소메 스프를 마시고 있다는 도르메를 만나려고 내려가다가 나는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리고 그 엉덩방아 밑에는 유리조각들이 있었다.
내 꼴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하여간 내 마지막 페이지는 몇주동안 병원에  맡겨졌다.

"찾았어."

이번에는 좀 더 침착한 어조로 그가 말했다. 가련한 내 친구.

"그래. 이번에는 어디에 있는데?"

"병원 영양사야."

도르메의 정체가 저번에 밝혀진거랑 다르지 않나? 라고 물어보려고 하다가 멈췄다.

"그 사람이 인정하던가?"

"아직 안 물어봤어."

"그래서?"

"묻는 건 자네 특기잖아. 가세. 날 좀 도와줘."

"방해하지 말아줘. 이제 겨우 마지막 두 단락이 남아 있는데."

그 놈의 억지타령에 결국 이번에도 엉덩이를 덜 실룩거리려고 노력하면서 영양사에게 갔다.
하지만 아까 전의 영양사는 내 질문에 모른다는 대답만 했을  뿐이었다.
기자 생활 하면서 수많은 유도질문과 정곡을 찌르는 질문으로 포장해 온 내 허영심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허영심은 마치 잘 익은 체리가 혀끝으로 사라지듯 사라져버렸다.

"이제 그만 포기하시지?"

나는 며칠 전 폭발한 내 타자기를 생각했다. 그놈의 도르멘가 뭔가하는 것 때문에 벌써 몇번이나 서비스센터에 못 갖다주고 있는지...

"포기못해."

"그럼 혼자 하게나."

나는 심통을 내면서 옆에 놓아둔 지팡이로 그의 잘난 구두윗코를 쿡쿡 찔렀다.

"혼자선 못해."

"뭘 못해. 기자면 아닌 것도 만들 수 있어.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  자넨 그 소질이 매우 풍부해."

"정말?"

"거짓말하는 재능 말야."

나는 마지막 세 줄을 고민하고 있었다. 초고는 이미 다 만들었지만 고쳐나가는 것이 힘들었다.
적당하게 치고 빠지는 단어를 넣을 순 없는 걸까.
아내에게 도움이 되게 여성 잡지를 많이 갖다달라곤 했지만 여성잡지라고 해서 남성잡지하고 크게 다를리가 없다.
다만 좀 더 부드러운 톤의 어조에 색색깔을 몽땅 다 집어넣어서 믹서기에 간 느낌만 더해졌다고나 할까.
온갖 루머와 스캔들. 그게 잡지의 어조인 듯 싶었다. 아마 세상 잡지는 거의 다 그럴 것이다.

"한가지만 알려주지."

나는 병상에서 살짝 몸을 일으켰다.

"미식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 음식평론가하고는 또 다르지."

"호오?"

"그러니까 자넨 미식가가 될 자격이 없고 찾는 눈도 없어."

채색이 잘된 옷이나 디자인은 눈을 즐겁게 해준다. 혹자는 그것들은 두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제대로된 미식가라면 그걸 부정할 것이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지 않던가?
아는 게 많으면 먹고 싶은 것도 많겠다고.

"음식평론가는 자신의 틀에 안 맞는 음식을 무자비하게 난도질하지. 분위기나 상황같은 건 생각도 안 해."

"미식가는?"

"도르메같은 미식가는 상황을 고려하지. 상 중인가? 혹은 지금 막 연애가 끝났나?  혹은 엉터리 기자가 뒤로 쫓아오지 않을까? 하고."

"마치 도르메가 된 것처럼 이야기하는군."

"잊어버려."

나는 붉은 홍당무를 다시 보면서 싱겁게 웃었다.

"자넨 그저 특종에 눈이 멀었을 뿐이야."

"엥?"

"자네 음식 좋아하나?"

"음. 사람이라면 누구나 먹는 거 아닌가?"

"세끼 다 같나?"

"내가 미쳤나? 한끼도 지겹건만."

"미식가는 세끼가 다 똑같을 때도 있어."

"그건 비싸고 좋은 음식 다 먹고 나서 돈 떨어졌을 땐가 보군."

"자넨 가정식이 얼마나 좋은 지 모르지?"

"...살려고 하는 일인데 뭐."

"우리 집에서 먹었던 저녁은 어땠나? 내가 그날 손수 요리한..." 

작정하고 대답을 들어보려는데 마침 아내가 들어왔다. 아내가 사준 잡지를 돌려주고, 새 잡지를 받았다.

"잘 아는가 본데. 그럼 도르메의 정체도 아는 거지? 혹시 자네가 도르메인가?"

"그만 좀 쫓아다녀. 오죽하면 내가 도르메인척 하고 싶은 줄 아나."

나는 투덜거리면서 아내에게 손을 흔들었다,

"오, 보그 다음호에 도르메가 특별 기고를 한다는군. 자네 한발 늦었네. 쫓아다니지만 말고 이메일로 연락을 취했으면 기사 하나라도 더 땄을텐데."

그래도 친구라고 잡지를 펼치면 친구가 관심을 가지는 종목을 찾게 된다.
비록 친구 덕분에 엉덩이에 유리가 엄청나게 박히는 상황에 처하긴 했었지만.

"마지막이라는데?"

내 말에 홍당무는 더 새빨갛게 익었다.
그리고 나는 쓰던 원고의 두번째 단어를 마저 써넣었다.


도르메와 식탁을 같이 한다면.

주어진 음식을 최대한 성실하게 먹고, 흔치 않은 재료에 목을 매지 말것.
그리고 유명세를 뒤따라다니고 파뒤집기를 좋아하는 친구를 두지 말것.
그들은 미식이 아니라 별난 것만을 좋아하는 사람일 뿐. 
미식이란 나무토막 한 뿌리라도 정성껏 요리해서 먹을 수 있는 소박한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원고를 완성해서 홍당무에게 보여주었다.

"뭐야? 도르메! 자네 도르메를 알아?"

"....."

"젠장!"

홍당무가 발을 쾅쾅 구르더니 화를 냈다.

"친군줄 알았더니 절교네! 이런 젠장. 똥밟았군."

도르메의 정체를 그가 안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아무 뜻도 의미도 없는 글자나부랑이만  만들 뿐.

"들어와요."

나는 1인실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는 도르메를 불렀다.
기다리고 있던 아내가 들어왔다.

"연재 마지막이군. 보그에서."

"......"

아내는 살짝 웃기만 했다.

"지금까지 쓴 요리평들은 모가 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래도 그 나름대로 확실한 기준을 세워서 이야기했기 때문에 인기가 있었던 거지. 하지만 언제까지 익명인가 했지만...이대로 끝내도 괜찮겠어요?"

그녀가 다시 웃었다.

"괜찮아요."

"흠. 원고도 다 썼는데 그냥 버릴까 봅니다."

도르메의 미식에 관하여 쓴 내 글은 장장 1만 단어였다. 도르메의 미식기준. 등을 쓴 그 책은 이번에 나올 미슐랭 가이드에 따로 첨부될 것이었다. 어디까지나 과거형이다.
나는 애써 만든 그 원고지를 라이터불에 태워버렸다.

"아쉽지 않아요? 여보? 그 글을 쓰느라 얼마나 고생했어요? 유리에 엉덩이를 찔려가면서."

"그렇다면 내가 당신에게 다시 묻지요. 도르메로 활동하면서 한 미식활동, 그 경력이 아쉽지 않나요? 저 원고가 마지막으로 실리면 약 4년간 쌓아온 미식가로서의 모든 활동이 없어지는데..."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은 동시에 말했다.

"괜찮겠죠. 미식을 한다는 게 호화롭게 산다는 뜻은 아니니까요. 음식이 사람보다 더 잘날 수는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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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0시 .출장다녀오니 밤....
그래도 잠들려고 노력했지만 안되어서 쓰는 글...
요즘 쿡방이다 먹방이다 해서 화려하지만...
이글의 베이스를 제공해준 건 그런 방송들이 아니라 스타일을 쓰신 백영옥 작가님의 익명의 음식평론가를 제 식대로 변주한 겁니다...

백영옥 작가님은 참 시대를 앞서가신 분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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