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명은 서서히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부친이 남겨준 저택은 항상 그가 거처하기에는 너무 크고, 쓸쓸했다.
그래서 항상 그는 다른 곳에 거처를 두었었다. 하지만 이쪽으로 발령이 나면서는 있는 집을 버릴 수도 없고 해서 짐을 다 풀지는 않았지만 대충 옮겨놓았다. 
가끔 생각할 일이 있으면 찾아 올 수 있으니 다행이긴 했지만.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생각했다.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옛날 그 어느 누군가를 생각하게끔 하는...

"뭘 생각하고 계십니까. 도련님."

정치인이 되려면 자신쪽이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통통한 얼굴의 호인 아버지가 그렇게 몇선씩을 하는 걸 보면서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이병률보다는 자신이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아, 지금 생각하는 사람...전혀 정치인이 될 재목이 아닌데...하고 있었지."

"표정은 여자를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만..."

"들켰군."

준명은 어릴 때부터 자신을 돌봐왔던 고용인의 손에 들린 잔을 받아들었다.

"홍차군. 밤에 이거 마시면 안되는 거 모르나?"

"...골똘히 생각하기에는 이것만한 것이 없지요. 흥분도 가라앉고, 냉정하게 생각하실 수 있을 겁니다. 뭔가 고민이있으신 것 같군요."

"음..."

집에 고용인으로 있다고는 하지만 과거에 법원에서 뼈가 굵은 그였다. 그의 말에 준명은 한숨을 쉬었다.

"귀신이구만."

"제가 도와드릴 일이라도?"

"아무래도 아버지가..."

"예?"

"아들들이 아버지를 뛰어넘어야 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 같아."

딴소리를 하면서 준명이 말을 흐렸다.
그 말에 눈치를 챈 노인은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예, 그건 참 힘든 일이죠."

"아무래도 난 함정에 걸린 것 같군."

"검사 일을 그만두신 것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하, 미모의 덫에 빠졌단 이야기야. 흐."

"아, 역시."

미묘하게 넘어가려고 했지만 상대는 넘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기엔 눈이 살아계십니다만. 저한테 하실 말씀이 있으시지요?"

"내일 아침에  경기도에서 낡은 서류 하나가 원본대조필이라고 해서 올 거야. 그건 원본은 내가 이미 가지고 있으니 보낸 사람은 괜히 수고만 한 셈이지. 그건 자네가 갈아버려. 두 개씩이나 필요는 없거든."

"어떤 서류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다지 중요한 건 아냐. 정부 백서 몇권이 헌책방에 있는 걸 서울 살 때 내가 구해놓고, 몇페이지를 뜯어놓고는 버리는 걸 깜박하고 다른 책에 다시 끼워놨더니 이게 흐른 모양이야. 사무실에 청소하는 친구에게 책상정리 부탁했더니 접어놓은 게 중요한 거 아니냐면서 다시 보낸다는군. 성가시게. 서비스 정신이 넘쳐도 탈이라니까."

"네. 처리해두겠습니다."

그렇게 고용인과 도련님은 별다른 인사말도 없이 한 사람은 방으로, 한 사람은 창가에서 달을 구경하면서 밤을 보냈다.

"그 서류는 내 손으로 처리하는 게 맞겠지만..."

준명은 중얼거렸다.

"아버지의 실수를 아들이 적나라하게 보는 건 아무래도 싫어서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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