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기가 흥건한 포도를 손에 한껏 담고 재향은 그 향기를 맡았다. 붉은 빛이 돌면서도 화려한 검은색으로 입안이 물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아직 먹기 전인데도.

"뭔 감상이 그리도 길어."

형은 그에게 면박을 주면서 아무렇게나 포도 한알을 입에 가져갔다. 그에게는 색도, 향기도, 모양도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소믈리에라는 직업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그에 반하자면 그는 어떤가. 아직까지 직업이 없고 고등학생일 뿐이지만 그에게는 사물의 모든 것이 다  소중했다.

"형은 아무렇지도 않아?"

"뭐가?"

한면을 보면 한면만 말할 줄 아는 남자. 재향의 형 기준은 단순솔직한게 장점이자 흠이었다.
왜 소믈리에가 되었느냐는 말에 여자들이 좋아할 것 같아서. 라는 단순무식한 대답을 대놓고 하는 사람이라고 재향은 형을 은근히 무시하고 있었다. 물론 인간적으로 흠이 있는건 아니지만...

왜 기준은 와인을 따를 때 향기를 맡지 않을까. 그 원료인 포도를 아끼지 않는가. 국내 와이너리에는 왜 안가는가...
등등의 의문을 재향은 가졌지만 그때마다 기준은 단순하게 대답했다.
돈도 없고 시간도 없다.
그래서 유감스럽게도 그는 3류 주방에서 일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그는 부모 잃은 동생을 키웠고, 외모 덕으로 꽤 괜찮은 직위에 오르기도 했었다. 물론 실력이 좌우하는 자리에서는 형편없이 밀렸지만.

"왜 이걸 보면 항상 감상에 젖지 못해서 안달일까. 하긴 포도만 그렇겠냐만."

기준은 포도를 빼앗아서 마저 입에 털어넣기라도 하듯 포도알들을 쫙쫙 훝어냈다.

"예술가를 꿈꾸는 거면...현실을 봐."

기준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시를 단정히 했다. 곧 레스토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말이 재향과 기준을 마지막으로 이어준 말이었다.

"어머, 바텐더? 너무 어린데?"

기준은 손님이 남긴 저녁으로 배를 채우다가, 식중독으로 사망했다. 자신의 과실이었기 때문에 보상금도 받지 못했다. 그가 동생을  좀 좋은 대학으로 보내기 위해서 3류 식당을 전전하면서 모은 돈은 겨우 2년치 생활비밖에 되지 않았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프랑스 와이너리나 외국 와인에 대해서 익히겠다고 생각한 그 꿈도 같이 날아가버렸다.
넉넉한 시절, 소믈리에를 그저 취미로만 생각하던 형이었지만, 재향에겐 나름 끔찍한 형이었다.
그가 그렇게 남긴 돈으로 생활하고나니 대학 갈 돈은 없었고, 남는 건 그 섬세한 후각과 미각, 그리고 손놀림 정도.
재향은 어린 나이에 대학을 가지 않고 바텐더를 선택했다. 
하지만 그는 형처럼 3류로만 머물고 싶진 않았다. 더 나은 공부를 하고 싶었다.

포도의 알싸한 향기, 리큐르들의 달달하면서도 그 각자의 향내...
크림의 부드러운 느낌.
버터를 바로 녹여낸 듯한 풍부한 맛.

그 모든 것을 느끼고 싶었고, 표현하고 싶었다.

"대학을 안 가서요."

그는 자존심이 세었다. 그래서 못 간게 아니라 안 간거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변성기를 아직도 거치고 있는 것 같은 그의 연약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에 여자들이 까르르 웃었다.

"어머, 추천 메뉴는?"

"추천 메뉴는 술 밖에...어?"

어설픈 바텐더이니 당장 주방으로 끌려갈 밖에. 메뉴는 당연히 있었지만 술만을 판매할 것을 고집하는 애송이에게 응징이 떨어진 것이었다.

"두하 누나"

"너 바보니? 먹으러 온 사람들한테 식사메뉴도 판매해야지? 네가 무슨 고흐니? 술 갖고 예술하게."

"예술...아니에요?"

"아니거든? 너 매니저 오면 혼 날 준비나 하고 있어. 벌써 몇번짼지..."

간단한 식재료 담당인 두하는 주로 식사메뉴를  만들었다. 물론 못 만드는 건 아니지만 그의 성에 찰만큼 맛있는 요리는 아니었다. 그러니 당연히 두하가 화를 낼 수 밖에 없었다.
두하도 물론 자신을 잘 알았기에 정도 이상으로 화를 내진 않았다.

"자, 예술하는 바텐더. 예술 아닌 식사 좀 해 ."

매니저가 왔다가 가는 오전 3시쯤 되면 두하는 간단한 지극히 간단한 수란과 토스트를 내놓았다, 그리고 그녀의 비전 아메리카노도 따라왔다.
무슨 원두를 얼마나 어떤 비율로 쓰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얼추 손감각이 있는 재향이라면 따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타고난 미각과 감각이 있으므로 커피를 공부해 보면 두하보다 빨리 실력을 익힐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3달이 넘도록 재향의 감각은 제자리였다. 어째서일까?기계가 없어서? 그라인더가 안 좋아서? 아니면 원두가 그 원두가 아니라서?....
그가 그 이유를 알게 된 건 그녀가 어느 커피 전문점에서 환하게 웃으면서 커피를 내고 있는 걸 보면서였다.


잊어버린 미소.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순간 재향의 마음이 갑자기 나타난 물체를 향해 경적을 울리는 기차로 변했다.

"왜 여기 서 있어? 영업방해야. 술예술가?"

"두하 누나 여기서 일해요?"

"음...근데?"

"커피 만드는 거 봐도 돼요? 그냥 구경만 할게요. 왜 내가 집에서 만드는 커피가 그렇게 안되는지 알고 싶어요. 분명히 평범한 커피일텐데..."

"커피에 같이 곁들이는게 있으니까."

두하가 빙긋 웃었다. 

"술예술가가 원하면 술예술가한테 맞는 커피하고 간식하고 먹고 가게 해줄게. 들어와."

재향은 자신도 모르게 딸랑, 하고 방울을 울리며 두하가 운영하는 커피 전문점 안으로 들어갔다.
술이 좋은지, 커피가 좋은지 말은 할 수 없었다.
단지 그의 감각안에서 그 모든것들이 춤추고 섞이는 순간이 있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는 두하와 작은 카페를 차렸다. 커피와 술을 파는 아주 단순하고 조그만 가게.카페 소믈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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