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명은 첫 만남에서와는 달리 은미를 사무적으로 대했다. 건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기에 마시는 음료도 커피는 아메리카노, 식사는 닭가슴살이었다.
"빨리 먹어요. 다음 장소에 들러야 하니까."
정의와 함께 하기로 했지만, 정의는 따로 시간을 뺄 수 없어서 길준의 부탁을 받았다는 준명과 같이 다니기로 했다.정의는 준명과 함께 하기로 했다는 말에 그 선이 분명한 검사님이라면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 같이 한 장소에서 은미는 생각했다. 최악이다...라고.
"너무 빨리 드시는데요..."
먹는 것 가지고 불평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준명은 지나치게 효율 위주의 인간이었다. 은미는 그에게 형을 구형받은 범죄자들이 불쌍하다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이럴 때 빨리 안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압니까? 범죄자들이 범죄를 저지를 시간이 더 늘어나죠. 그럼 조금 느긋하게 먹으려고 하다가 다음 밥은 아예 넘기지도 못하는 겁니다."
"......"
그게 농담인지 아닌지 헷갈려 하고 있을 때 준명이 단도직입적으로 그녀에게 물어봤다.
"살인죄의 공소시효가 언제까지인지 아십니까?"
"오늘 뉴스에 나왔잖아요. 이젠 미제 사건이란 있을 수 없...아!"
"당신은 그 범죄자가 누군지 알고 있죠. 다만 용기가 없어서 못 하고 있을 뿐이고, 당신은 증거가 없어서라고 이야긴 하지만, 아니에요. 이 사건에 개입된 어느 누구도 증거가 없어서 일을 못 하는게 아니라고."
"......"
"그래서 내가 불려온 겁니다. 하필이면 공교롭게도 단지 이 사건을 가장 모른다는 이유로 당사자 두 사람한테 말이죠."
솔직하게 본론에 들어가는 준명때문에 은미는 순간적으로 숨이 꽉 막혔다.
"...그럼 범인을 잡을 수 있는 건가요?"
"그건 내 문젭니다."
마치 자기 부하를 부리듯이 준명은 그녀에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하지만 은미는 알고 있었다. 지금은 같이 움직여주지만, 자신의 출세에 도움이 된다 싶으면 준명은 곧 돌아서리라.
"우선은...관계확인부터."
검사가 조사하듯이 준명이 천천히 언제 받았는지 모르는 파일을 들고 그녀를 취조했다.
"여기에는 우선 당신이 적어놓기로는 불륜의 애정관계가 파탄나면서 총상을 입었다고 되어 있군요. 만나지 못한 그녀의 남편은 전직 경찰이었으니 틀리진 않았을테고...이의원의 말에 의하면 당신은 그녀와 사촌관계이며 한때 이의원과 절친한 사이였다고...이의원이 정치계에 입문하려고 했을 때 인맥이 되었던 인물이 당신이고...
그리고..."
준명이 말을 끊고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지금은 이준구씨가 운영하는 요양원의 행정직원으로 근무하고 있군요?맞나요?"
"네."
"당신은 이 문서에서 애매하게 범인을 지목하고 있습니다. 모 여당의 스캔들에 관련된 야망을 품은 공무원이 그들의 약점을 이용 핵심으로 들어가고자 했다는 거죠...단순 불륜이 아니라 관음증적인 불륜...이라...그 여자도 대단한 여자군요."
"언니를 모욕하지 마세요."
"모욕 아닙니다. 실제 관계가 그러니까."
준명은 후루룩 서류를 넘기고는 종이냅킨에 펜으로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우선은 그 살인자에 대해서 조사하는 것부터 시작하죠. 그가 누구인지, 왜, 하필이면 그 살인이 끝난 후에, 그 남편까지 노리고 있는지...그리고 익명의 누군가가 전산망을 꼬아놓아서 거물 정치인을 스캔들에 빠뜨렸는지...아, 이경우에는 빠뜨린게 아닌가...자기가 허락했으니..."
"대상자가 누군지는 다 아시잖아요!"
은미의 항의섞인 말에 준명이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법은 감정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