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정에게는 중요한 일이 하나 남아 있었다. 자신의 일생을 결정하다시피했던 사수와 다시 만나는 일이었다.
그 사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도양양한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상사와의 술자리에서의 실수때문에 모든 게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오래간만이네요. 선배. 잘 있었어요?"
단순한 실수라면 그렇게 마무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다. 어머니의 치매는 점점 더 심해져서 얼마 뒤에는 새벽녘에 집을 나가버리는 일까지 발생했다.
외동아들이라 모실 수 있는 사람은 그 하나밖에 없는데, 부양하기 벅찬 요양원에까지 모시고 가야했던 것이다.
"잘 있는것 같아 보이니?"
비아냥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유쾌한 어투도 아니었다.
"아르바이트 금지때문에 미치겠다."
"그래도 얼마 전에 계장 달았잖아요."
"계장 월급 얼마 된다고. 더더군다나 이번에 잘못하면 징계까지 먹을 수도 있다는데...자칫 잘못하면 강임이야."
"힘들죠?"
"어디 괜찮은 요양원 있으면 좀 보내드리면 좋겠는데..."
"회사에서는 뭐래요?"
"자꾸 말썽피우지 말고 다른데로 전출 가라고 하더라...근데 난 뼛속까지 이곳 사람인데 어딜 가라고 하는지 원..."
"차라리 다른델 가면 나을 수도 있잖아요."
"아서라. 계장 단 몸을 누가 반기겠니."
그렇게 이야기를 하다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있었다. 마침 생각난 김에 미정은 지갑에서 길준 ,아니 준구의 명함을 꺼냈다.
"이거, 제가 아는 요양원을 운영하시는 분이에요. 이분 직통 전화니까 이리로 전화하면..."
"고맙다."
"그리고 혹시 통화 되시면 제 이야기도 좀 해주세요. 그럼 좀 생각해주실거에요. 전 그분이 하시는 일을 좀 도와드리고 있거든요."
그건 그의 일생에 있어서 치명적인 실수가 되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살짝 빛나는 열쇠였다.
그는 소중히 그 명함을 받아들고, 천천히 그 명함의 이름을 읽었다.
이준구...
자신의 어머니가 가게 될지도 모를 요양원의 후원자...
그는 절망을 검정색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는 항상 색깔있는 옷을 입지 않는 가난한 흰색이 절망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요양원의 그 흰색도 마찬가지 절망이었다.
하지만 그가 지금 보고 있는 명함은 아주 연한 노란색의 오렌지 빛깔 창틀을 단 유럽식 가정집같은 느낌의 요양원사진이 배경이었다.
'조금은 희망이 생기는군. 전화해보라고 했었지?'
어쩌면 여기라면 가능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