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미는 요양원에 딸린 체육관으로 들어갔다. 길준에게 루가에 대한 걸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마침 길준은 한 유도선수와 함께 연습중이었다. 낙법을 구사해서 상대 선수에게 받은 충격을 완화한 그는 다시 벌떡 일어나서 상대의 옷깃을 잡고 붙었다.
그러다가 한바퀴 돌고 나서 다시 내쳐졌다.
일어나면서 길준이 짓는 표정을 보고 은미는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덜컹거렸다. 저 눈매는 조금은 다르지만.
한때 자신을 설레게 했던 병률의 표정과도 닮아 있었다.
"사장님."
길준이 다시 일어난 후 상대 선수에게 인사를 한 후 은미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은미씨? 무슨 일로..."
"루가씨 문제로..."
"그 문제라면 나중에 이야기합시다. 좀 있다가 또 만날 사람이 있어서..."
길준은 그렇게 말한 후 매트위에 잠시 앉았다.
"오늘은 체육관에서 몸을 좀 풀어야겠습니다."
"...사장님."
"만약에 있을 일을 대비해놓는 것도 그렇게 나쁜 건 아니죠."
그 말에 은미는 병률을 떠올렸다. 만약의 경우라면, 길준은 언젠가 병률과 맨몸으로 맞붙는 걸 생각하는 것일까?
병률도 물론 그녀가 알기로 단련을 게을리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러니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병률이 결코 그럴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막상 막하가 되리라.
"사실은."
길준이 다시 일어나서 몸의 굳어진 부분을 풀었다.
"나는 기분나쁜 일이 생각나면 체육관에서 몸을 풉니다. 적당히 하려고 했는데 당신 얼굴을 보니 다시 기분이 별로 안 좋아져서요. 당사자를 앞에 두고 할 말은 아니지만."
"왜 제 얼굴을 보면 기분이 나빠지시죠?"
그녀의 말에 길준이 피식 웃었다.
"당신은 내 아내를 닮았습니다. 혈연관계가 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그리고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복수심과 연민과 분노가 항상 따라온다는 걸 알죠. 그 배후에 있던 인물에 대한 연민처럼."
"그건 병률씨를 두고 이야기하시는 건가요?"
"아니. 그 보다 더 안쪽. 내 분노는 거기를 향하는 게 옳을 것 같습니다. 그 진범을 혼내줄 수 없는 게 내 한계죠."
"정치인 말씀하시는 건가요?"
정말 은미는 궁금했다. 이 남자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걸까...
"아니, 내 마지막 상대는 그냥 정치인이 아닙니다. 하지만 병률을 응징한다는 건 그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복수하는 것일 수도 있겠죠...당신은 서글프겠지만."
혈연관계라는 건 또 어떻게 알았을까...은미는 서글퍼졌다. 이 남자는 마치 눈앞에 장막이 없는 것처럼 거침없이 이야기한다. 일 관계도 몇번의 삐걱거림 이후 부터는 직설적이고 확고하게 진행한다.
금괴를 찾으러 간 날도 은미와 몇번의 전화통화 이후, 그 마을 사람들이 눈치채지도 못하게 트럭과 운반기계를 들여서 그 금괴를 조용히 실어날랐다고 했다.
"제가 왜 서글플까요..."
마음추는 이미 길준에게 기울었는데, 한때 무척 사랑했던 원수는 그녀를 이용해 다른 일을 벌이려고 하고 있는데...
그 점은 길준이 모르는 것 같아 은미는 마음이 아팠다.
"그 남자가 더 이상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당신에게 남은 건 그 남자에 대한 복수 뿐이니까...그럴 겁니다. 당신은..."
그때 체육관으로 건장한 레슬링 선수 하나가 들어왔다. 길준은 거기서 말을 끊고 레슬링 선수와 이 이야기, 저 이야기 나누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