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진 온 의사가 고개를 저으면서 다녀갔다.
아내는 눈을 뜨지 못한다. 고장 난 장난감처럼 모든 것이 정지되어 버렸다.
아내의 친정에서도, 우리 집에서도 이혼하라고들 강요한다.
왜 다들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걸까? 아무리 철모를 때 한 결혼이지만 이제 와서 모든 것을 갈라 서기한다는 것은 내 자존심이 용납을 하지 않는다.
“형부 생각이 맞아요. 우리 집에서도 사실 형부의 행동이야말로 정말 지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이라고...”
이제 15. 뭘 알고 떠드는건가 싶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런 깊은 의미는 없습니다.”
아내가 웃는 것 같다. 다가가서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아주었다.
살아있을 때 단정한 것을 좋아하고, 항상 주변을 깨끗이 닦아내던 그 손길만큼은 아니지만.
아내가 시원해하는 것 같다.
아내는 일본인이다. 민족의식 강한 우리나라에선 식민지 사나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출세라고 비아냥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나는 고학생이었다. 아내 집안은 대지주였고...그랬기에 터져나온 비난이었고, 반대였을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안 건 중학교에서 고보로 막 온 시기였다.
우리의 연애는 중학교때 시작되었는데 그때 그녀가 기관지가 별로 좋지 않다는 말을 그대로 믿은 것이 문제였다.
중학 시절 우리가 사귀는 것을 알자 아내의 집안에서는 폭력배까지 불러들여 날 겁주었고, 우리 집안에서는 가끔 그녀가 주변을 도는 것을 알자 물을 뿌려 쫓아내기까지 했다.
하지만 본래 반대하면 더 불타오르는 법.
우리는 갖은 지혜를 다 짜 고보 들어가자마자 정식으로 혼인을 했다.
결혼을 하면 본래 직장을 준비해야 하고, 해야했지만 막상 혼인을 하고 보니 장인어른댁에서 보니 대장성에 갈만한 인재같다며 내게 고시준비를 하라고 했다.
인재! 그 얼마나 달콤한 말이었는지!
그 당시 공부는 내게 입에 착착 들러붙는 달콤한 사탕같았다.
장인이 준비해준 사탕을 입에 넣고 삼키려는때에...아뿔사.
사탕은 입에는 쓰지만 몸에는 좋지 않지 않던가...
상황은 일본인들에게 안 좋게 돌아갔다.
전쟁에서 폐색이 짙어지고 있을 때에 일본이 광태를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징용, 군대 징집...
나라고 해서 조선의 남자이니 거기서 빠질 도리가 전혀 없었다.
일본인 아내와 결혼하고 있는 몸이니 그래도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장인의 힘으로 겨우 그 시끄러운 상태에서 벗어났다.
“욕창도 생기지 않게 잘 닦아주오.”
오후 시간에 정규 간호사가 와서 몸을 닦아주고 주사를 놓아준다.
아내를 그녀에게 맡기고 나는 처제와 함께 마당에서 닭들이 노니는 모습을 보았다.
“예전부터 그랬다면 형부가 이렇게 해주셨을까요?”
처제의 말에 나는 덤덤해졌다.
식민지로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일본이지만, 얄밉게도 그런 와중에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마음도 있다는 걸 나는 안다. 나라는 민폐를 끼쳐도 개인은 민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그 사고가 나는 항상 놀라웠다.
“결국은 그랬을 겁니다.”
신혼 후 2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아내의 몸이 서서히 굳기 시작했다. 대장성에 갈 꿈은 접어두고 나도 학교는 간신히 졸업만 한 채 아내를 돌보기 시작했다.
“그랬겠죠. 하지만 외지인에게 그런 꼴을 보여줘서는 안된다고 아버지께서 항상 말씀하셨어요.”
“아야코.”
“죄송해요.”
“아니오. 장인어른은 하실 말씀을 하신 거지.”
몸 구석구석을 깨끗이 닦아내고 효과없는 약이나마 주사를 놓은 뒤 간호사는 돌아가버렸다.
처제를 돌려보내고 나는 미동도 없이 누워있는 아내의 눈썹에 입을 맞춘다.
그런다고 다시 옛날의 그 예쁜 눈을 떠줄 리는 없겠지만...
그리고 나는 거실 한구석에 놓아둔 장롱 서랍에서 둘둘 싸놓은 알약을 꺼내 가루로 만들어 아내의 입에 털어넣었다.
그런 와중에 문간 싸릿대에 돌이 부딪혀 타닥 소리가 난다.
골목 동네 아이들의 장난질이다.
“친일파놈, 일본년이랑 붙어먹는게 좋더냐! 이제 일본은 끝났어. 쪽빠리 놈아!”
“하긴 불쌍하기도 하지. 출세하려고 내지인 여자 얻었다가 고생만 하고...”
“네놈들은 꼭 벌을 받을 거야!”
악다구니는 그녀의 귀에 닿지 않으리라.
나는 물을 그녀에게 먹이고 이내 그녀의 곁에 누웠다.
근육의 악화로 전체적으로 시들어가는 그녀, 내 말을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는 상관없었다.
어차피 살지 못하고 죽는다면 일본이 망하기 전에.
라는 마음으로 나는 독약을 한입 한입 그녀의 입에 털어 넣은 것이다.
결혼한 것은 사랑이었지만, 현실은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그녀를 돌볼 만큼 사랑은 하지만, 그로 인해서 내 앞길이 막히는 것을 원할 정도로 사랑하진 않았다.
겨우겨우 창씨개명을 면하고, 대장성 시험 치는 것도 면했으니...이제 남은 것은 저 치기어린 아이들의 말대로 일본이 망하는 것을 보는 것 밖에 남지 않았다.
그 날이 오면 두 가지 선택을 해야할 때가 올 것이다.
살아있는 자는 살아있는 자의 선택을, 죽어 있는 자는 죽어있는자의 선택을.
그리고 우리 둘이 나란히 함께 살아가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
다정하게 그리고 냉혹하게. 세상은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