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눈을 뜨자마자 싸웠다. 이건 틀림없는 부부싸움이다. 결혼한지 이제 겨우 3개월이 지났을 뿐인데, 이게 다 그 신혼여행때문이다. 틀림없다.
아내의 분홍빛 귓불, 복숭아같은 빛깔의 살결...
나는 그녀의 모습을 사랑하고, 살결만큼, 아니 그보다 더 아름다울 마음씨도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 다는 아니지 않은가.
여자로서의 몸단장을 중시하는 것도, 남들앞에서 소박하게 웃는 모습도 좋아하지만, 여행지에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웃음을 나누는 것이 결코 좋게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여행용이라고 일부러 좋은 옷을 구해서 입고 간 것도 낭비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아니, 왜. 그 옷을 입고 남자들과 시시덕거리는지...


하여간 그 신혼여행 이후부터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그나마 갈라진 마음을 다독이기 위해서 한적한 도시의 호텔 룸에 숙박해서 저녁은 룸에서 해결하고 있다. 하지만 같이 있는 그 시간인들 서로 마음이 편할리가...
그래서 룸 서비스를 시켜놓고도 아내와 나는 시간대를 달리 해서 식사를 하고, 저녁 산책이나 쇼핑을 하거나 하면서 되도록 떨어져 있다.
지금은...그냥 신관으로 가는 길목의 정원을 거닐고 있다. 그때 도란거리는 다정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오, 이건 멋진 도자기인데...
남편인듯한 사람의 목소리와, 부드럽게 울리는 여성의 목소리였다.

"덴마크에선 로열 코펜하겐이 유명하더라구요...그 중에서 다니카...당신 생각이 나서 골라봤어요. 어때요. 마음에 드세요?"

"보라색이구려. 아주 아름다운 색이야. 뿌리까지 달렸군."

"당신도 뿌리달린 모양새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시죠?"

"음...생물이 눈앞에 있으면 좀 안스럽겠지만 말이지..."

 그들은 정원을 천천히 거닐고 있었다. 보기 드물게 한복차림으로 고무신까지 갖춰신은 모양새가 고풍스러워보였다.
그래, 돈을 쓰면 저런데 써야지...시시덕거리는데 쓰지 말고...라고 생각했다가 내가 그 여행동안 한 일이 무엇인지 생각났다. 먹으러 다녔었지...먹으러...
술을 진탕 퍼마시고, 맛집을 돌아다니는 바람에 호텔에는 아내가 혼자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그 두사람의 산책은 천천히 하지만 길게 가고 있었다. 얼핏 대화를 들어보니 남편인 것같은 남자는 도예에 취미를 둔 은퇴 공무원이었고, 아내되는 사람은 해외를 자주 돌아다니면서 미술일을 하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그걸 떠나서 두 사람은 완벽한 한쌍같았다. 외모나 직업을 떠나서 그 두 사람의 은발은 깔끔하게 손질되어 있었고, 묘할 정도로 어조와 느낀 바를 이야기하는 것이 한사람을 보는 듯 했다.



"그래서 이번엔 덴마크를 갔다왔구려. 다음에 언제 출장 예정이오?"

"...음, 다음 출장은..."

"설마하니 또 그 대답인가? 못 돌아온다는?"

그 순간 나는 좀 뜨악했다. 저 부부는 원래 헤어져 살던 사람들이었단 말인가?

"어머나."

"20년전에 그런 대답이었으니 지금도 비슷할 수도 있겠군."

"이젠 저도 늙었어요.예전같지 않다는 이야기죠."

"음..."

"출장은 덴마크로 끝이고, 그 이후에는 국내에 있을 예정이에요. 저도 곧 은퇴하게 되네요."

남자는 살짝 고개를 여자 편으로 숙였다.

"그럼 이제..."

"하지만..."

여자와 남자의 예상은 달랐던 모양이었다.

"이제 우린 이게 너무 익숙해지지 않았어요?"

여자의 말에 남자가 씁쓰레한 표정을 짓는 건 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렇지...우린 그렇게 시간을 보냈지...당신 남편이 죽는 순간과 내 아내가 죽는 순간을 기다리면서 말이오. 하지만 그 기간동안 우리는 이 정원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었지. 그것만으로 충분했을 것을...내가 욕심이 과했던 모양이오."

"저도 이제사 꼽아보니 그게 욕심인걸 알게 되었어요."

"그럼 이게 마지막인거요?"

남자의 말에 그녀의 어조에 살짝 균열이 생겼다.

"아니오...앞으로도 한동안은..."

"......"

"그렇겠지.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게 될거요..."

단 한번이라도 그녀의 살갗을 가까이 할 기회가 있었더라면.
좀 더 젊은 시간에 그녀와 함께 면으로 된 티셔츠를 입은 채 일광욕을 할 수 있었더라면...
그들은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이거 받아요."

남자가 말했다.

"뿌리가 달린 달개비네요. 아주 예쁘군요."

" 내가 덴마크만큼은 아니지만 내가 직접 달개비 접시를 하나 만들거라오. 그걸 본따서 뿌리까지..."

"그 전에 저하고 할 일이 있었지요?"

나는 그들의 모습을 좀 더 뒤에서 관찰하고 싶었지만 그들보다 내 속도가 빨라 그들을 지나치고 말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기 위해 뒤돌아보았을 때

"역시 여기에 잘 어울리는군,"

"그러게요."

두 사람은 호텔 산책로에서 살짝 떨어진 바위 틈에 달개비를 심고 있었다. 흔해서 볼 것도 없는 그 꽃이 어둠속에서 한들거리고 있었다.

"우리, 다음에도 여기서 다시 만나요...."

그들을 지나쳐 룸서비스가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올때 난 좀 우울했던것 같다.
그런 우울함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저렇게 완벽한 한쌍조차도 쉽게 하나가 되지 못했다는 건, 서로에게 다른 짝을 만나 일생을 불행하게 살았다는 건 우리 부부도 그럴지 모른다는 이야기 아닐까...
그렇게 문을 열었을때 침대에 엎어져 자고 있는 아내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좋아해서 시킨 치킨 난방즈케가 엉망진창으로 뜯긴 상태였다.
 나는 아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보기 좋은 이마를 손으로 살짝 만졌다.
그녀가 좋은 꿈을 꾸는지 미소를 지었다.
치킨 난방즈케가 다 뜯겨져도 우리는 이제 겨우 시작인 것이다...
평생 이어질지, 아니면 뜯길 듯 뜯길 듯 하면서 이어질런지... 사람의 가족사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난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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