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정해졌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은 없었다.
지윤은 결연하기조차한 태도로 길준의 질문에 답했다.

"내 방법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셔서 그냥 가시게 내버려두긴 했습니다만."

길준이 빈정거리는 표정을 숨기지도 않고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너무 솔직해서 거부감이 들 정도였다.

"난..."

"솔직히 말해서 전 신부님이 대안을 가지고 계신 줄 알았죠. 설마하니 악마같은 사람이 운영하는 집단에 돌아오고 싶어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만큼 세상에 대해서 알게 되신거라 생각해야겠지요? 하지만 이제 여긴 당신 자리는 없습니다. 신부님. 안녕히가십시오."

"난 더 이상..."

"더 할 말이 있으신가요?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만. 나가주시죠. 앞으로 여기엔 경찰들도 자주 발자국을 남기겠죠.저는 그런 파리떼들을 쫓으며 당신들과 함께 할 여유가 없습니다."

이준구가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길준은 손으로 그의 앞을 막았다.

"난 더 이상 신부가 아닙니다. 그리고..."

허망하게도 길준은 더 이상 허용하지 않았다.

"신부가 아니면 더더군다나 쓸모가 없는데요? 당신은 그동안 뭘 한겁니까? 로만 칼라는 쓸모라도 있지. 신부가 아닌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습니까?"

"잠깐."

그때 털보가 나섰다.

"커피에 데인 자국에 대한 이야기라면 당신도 생각은 달라질텐데?"

그 말에 은미가 급하게 길준쪽을 돌아보았다. 길준은 냉담한 태도를 유지했다.

"뜨거운 커피에 데인 사람이 어디 한 둘입니까?"

"....."

"흥미가 있으니 당신도 저 친구를 우리한테 보낸 거 아닌가? 그래서 할머니도 이쪽으로 모셔온 것일텐데? 그러고 보니 그 할머니 지금 어디에 계신가?"

그 말에 길준이 잠시 멈칫했다, 미미한 떨림이긴 했지만 털보는 느낄 수 있었다.

"그분은 우리의 첫 손님입니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길준이 대답했다. 아까전까지의 동요를 감춰버린 그 태도에 털보는 내심 감탄했다.

'확실히 그 금괴를 다 차지하고도 남을 정도의 연기력이군. 저 정도면 아버지도 만만찮은 후계자를 길렀는걸, 내가 만나본 치들 중에서도 제법이야'

"거짓말."

지윤이 끼어들었다. 털보는 잠시 성가심을 느겼다. 하지만 아까전의 그 대화로 내내 꿔다놓은 보릿자루같은 취급을 받은 동생이 반격을 시작했다는데 반가움을 느꼈다.

"그 상태대로라면 오래 못 갔을 겁니다. 당신이 아무리..."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겁니까."

길준의 차분한 어조가 약간 무너졌다.

"내가 굳이 당신들에게 내 이야기를 다해줘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은미씨. 
 경찰 다시 불러요, 아무래도 말이 안 통하는 것 같군."

"당신은 비밀을 들킬까봐 무서운 겁니다."

지윤이 날카롭게 파고 들었다.

"당신이 당신의 적에게 몰릴 때 당신을 구하지 않았던 어머니를 원망해서, 그들에게 다시 당한 어머니를 구할 생각이 없었다는.."

짜악!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지윤이 한발 휘청거렸다.

"네가 뭘 안다고!"

처음으로 길준이 존칭을 쓰지 않고 한 말이었다.

"우리 추측이 맞나보군. 백만장자씨."

털보가 웃었다. 하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의 짙은 갈색 눈동자는 마치 눈앞에 불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 같았다.
불앞에 서 소리지르면서 서 있는 전사와 같은 마음으로, 하지만 차분하게 가라앉은 도박사의 자세로 그는 천천히 말했다.

"여기서 다시 경찰을 부르더라도 난 상관하지 않아. 하지만 이제 진짜 본질을 이야기하지.
금괴이야기라면 좀 마음이 동하지 않을까? 상속자들을 찾고 있었을텐데 말이지..."

그 말에 길준이 대답했다.

"이제 좀 쓸만한 이야기가 나오는군요. 하지만 당신옆에 있는 전직 신부는 소용이 없으니..."

자리를 피하게 해달라고 할 생각이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윤이 다시 기세좋게 말했다,

"나도 여기에 있을 자격이 있습니다. 당신은 그 성경책을 기억할 겁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