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미는 길준에게 왜 지금까지 시설에 대한 진척이 없는지를 물었다.
길준은 나른한 표정으로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도대체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겁니까?”
길준의 물음에 은미는 기가 막혔다. 자신이 아는 두 남자가 똑같은 태도로 나오니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더더군다나 그 두 사람은 철천지 원수가 아니었던가? 어느 하나가 무기력하다면 반대편은 때를 노려 결정타를 먹여야 하는 게 그녀의 상식이었다.
하지만 둘 다 뭐에 씌이기라도 한 것처럼 물렁물렁하기만 했다.
“시작하신 분한테 묻지 그러면 어떤 분한테 여쭤 봐야 할까요? 전 당신 보좌역으로 왔으니...”
“원수가 보내준 보좌역이지."
길준이 차분하게 말을 잘랐다.
“그걸 아시면 시작을 하셔야죠.”
“...당신도 참 뻔뻔한 여자지.”
그렇게 말하고 길준은 시선을 돌려보렸다. 약간 멍한 시선이 약이라도 하는것 같다.
기존에 그에게 들었던 말이 맞다면 그는 어디서 얻은지 모르는 재산으로, 아내를 잃은 슬픔을 달래고 있는 것이리라. 그것이 옳은 방법인지 아닌지 신경도 쓰지 않고.
“정신차리세요. 언제까지 그 유령에 매달려 있으실 작정이세요. 원수가 보내준 여잔지 알면 절 어떻게든 이용해서 결정타를 먹여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럼 당신이 슬퍼지겠지.”
안락의자에서 몸을 반쯤 일으켜세우면서 길준이 덧붙였다.
“당신은 그치를 사랑하니까.”
“개인전화를 도청하셨군요.”
그녀의 말에 길준이 살짝 입꼬리를 내렸다.
“당신이 아는대로죠. 나는 지금 이 상황에서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준구씨만 빼고.”
“사랑하는 사람을 공격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도청만 해가지고는 제 마음은 모르실텐데요.”
은미의 말에 길준의 딱딱한 얼굴에 금이 갔다.
“당신 이중인격잡니까?”
“그럼 당신은 마약중독자구요?”
은미의 공격에 다시 길준의 얼굴에 무기력함이 감돌았다.
“그만합시다.”
“먼저 시작한 건 당신이에요. 함길준 이사님.”
“......”
은미는 그에게 향하던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길준이 가장 충격받을만한 말을 골랐다. 아주 신중하게.
“어머니 행방을 찾았어요. 돌아가신건 아닌것 같아요. 상대편에서 어머니를 애타게 찾고 있더군요. 이준구씨 말대로 상대방은 당신을 아직도 노리고 있는 거에요. 그리고...마지막으로 흔적을 찾은 곳이 당신이 감금당했던 병원이었어요. 그곳에서 그 사람들이 당신 어머니를 놓친 것 같아요...이제 살아계신지 안 계신지도 모르게 되었어요. 당신이 그때 돌아가셨다고 단정만 짓지 않았다면 조금 더 빨리 찾을 수 있었을텐데...”
“어머니가?”
길준은 입에 물고 있던 마약을 태워 흡입하던 기구를 떨어뜨렸다. 그건 지금까지 몽롱하게 그의 주위를 맴돌고 있던 아내의 환영마저 지워버릴 정도로 강한 충격이었다.
“이제야 제 정신을 차리셨군요. 그러니 얼른 준비하세요. 빠른 시일내로 어머니를 모셔와야할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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