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윤은 은미에게 호기롭게 말은 했지만 앞이 막막하다는 것을 알았다. 뭔가 계획하고 있는 건 있었지만 과연 가능할런지 의문이었다.
눈앞에 있는 남자를 설득할 수나 있을 런지.
대학로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음침한 민속 술집 안에서 털보 한명 상대하기 쉽지 않았다.
세상물정을 너무 잘 아는 한 남자와 세상을 모르지만 정리된 세계에서 살았던 남자와의 대화는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져나갔다.
“신부님, 그래서 나한테 그걸 시켜볼 작정이슈? 신부답지 않게스리.”
오랜만에 만난 형제는 그에게 반농담조로 시비를 걸었다.
“형. 제발 부탁입니다.”
“나는 그 시팔 친척모임에 끼어들 생각 없으니. 가슈.”
“형.”
“형님이란 소린 듣기도 싫다.”
민속술집이라는 곳에서 대통술을 자작하던 그가 충혈된 눈을 그에게 돌렸다.
손님이 하나도 없는 곳에서, 맛없는 술을 술에 취해서 항상 자작하니 항상 그 모양이지...라는 다른 형제들의 비아냥거림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형은 여기저기 맺어둔 인맥이 많잖아요.”
“그걸 가리켜서 우리나라 말로는 건달, 내지는 깡패라고 한다지. 네가 자초지종을 설명한 그 집단도 같은 집단 아니면 뭐냐. 또 정의파 신부답게 말도 안된다며 뛰쳐나온 건 어쩌고. 한편을 먹었으면 계속 끝까지 한 편 먹어야 하는 거야. 그게 의리지.”
“형.”
충혈된 눈동자의 그가 동생을 힐끗 위아래로 내려보았다.
“로만 칼라라. 하! 우리 아버지 집안에서 설마하니 신부가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네.”
“형.”
“그럼 이렇게 하지.”
형은 커다란 대통술을 그 앞에 내밀었다.
“이거 다 마시고 쓰러지지 않고 대학로를 쭉 다 걸으면 들어주지. 참고로 이거 대통술 아니다. 이름은 들어봤나? 폭탄주라고? 소주,보드카, 압생트, 종류별로 다 고루 섞어서 장난 아니지.나는 이걸 매일 마셔. 아, 이걸로는 너무 쉽군. 그럼 이렇게 하자. 대학로를 날 업고 걸어다녀야 해. 3바퀴.”
“...잠깐만...”
“못해? 못하면 징징 울면서 돌아가. 실행 못하는 정의는 정의가 아냐. 너하고 입씨름할 생각은 더
더욱 없으니 할거면 하고, 말거면 말아.”
지윤의 이마에 골이 깊게 졌다. 어처구니 없는 시험이었다.
지윤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술 한번 입에 댄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형제의 요구는 그가 형제에게 요구한 것에 비하면 쉬운 일이었다.
“좋아요. 대신 약속 지키는 겁니다.”
“물론이지.”
그 시간 은미는 당회의가 끝난 후 병률의 전화를 받았다.
“나야.”
그 말 한마디에 은미의 얼굴에 수심이 끼었다.
“잘 되었나요?”
“당회의는 무사히 끝났어.”
“아니. 내가 그걸 묻는 건 아니고요...”
“유산했다더군.”
은미는 너무 건조한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그 목소리에는 비탄도, 어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기계적으로 울리는 목소리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녀와 친분이 있는 보좌관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와는 너무 달랐다.
“언니는 괜찮대요?”
“나쁘진 않은 것 같아.”
“...정말 괜찮아요?”
은미의 말에 그가 울림이 있는 목소리로 천천히 대답했다.
“괜찮아. 유령같은게 씌인 것 말고는...”
“유령?”
“유령.”
은미는 길준이 말하던 것을 떠올렸다.
[내 눈앞에 그녀가 보여요. 그녀는 내게 모든 것을 보여주죠. 진실과 어둠을.]
“특별한 일이네요.”
은미가 입술을 달싹였다.
“당신답지 않네요. 설마하니 아기가 벌써 유령이 되었다는 건 아니겠죠.”
“......”
“그 이야길 하려고 나한테 전화한 건 아니죠?”
병률은 잠시 시간을 뒀다가 천천히 이야길 꺼냈다.
“동영상 전화로 전화할 걸 잘못했군.”
그리고 잠시 뒤 다시 이었다.
“네 얼굴이 보고 싶어. 은미야.”
은미는 숨을 잠깐 멈췄다. 그렇게 바라던 순간이.
그렇게 꿈꿔 왔던 순간이. 그녀에게 찾아왔다.
“그럼 만날까요?”
그녀가 그의 부름에 응해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