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도착한 병률은 먼저 윤희부터 찾았다. 이미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초조한 마음은 엉뚱한 곳을 계속 찾았다.
“후보자님 좀 천천히...”
새로 뽑은 보좌관이 그에게 말했다.
“체통이 있으시잖습니까. 그렇게 마구...”
“마구?”
다급하게 윤희를 찾던 병률은 순간적으로 보좌관의 멱살을 잡았다.
“이게 마구지.”
“......”
새파랗게 질린 보좌관의 얼굴에 대고 병률이 천천히 말했다.
“마구가 뭔지 가르쳐줄까요? 언제 플래시 터질 지 모르는 상황에서 보좌관의 멱살을 잡는게 마구입니다. 그리고 유산 위기에 처한 아내를 찾는 건 마구가 아니에요. 진심으로 걱정되는 거지. 알겠습니까?”
병률의 얼굴을 알아본 간호사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병률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보좌관의 멱살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병률은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유산됐군요...아내는, 아내는 괜찮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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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찾으러 가지 않으십니까?”
지윤이 떠나갔다는 말을 은미에게서 전해듣고 길준은 잠시 울증 상태에 빠졌다.
이준구가 보아왔던 길준의 모습과는 좀 달랐다.
“...찾은들 뭐하겠습니까.”
안락의자에 몸을 거의 눕히다시피한 길준이 대꾸했다.
“제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지윤씨는.”
“...뜻 모를 이야기군요.”
준구는 반대편 의자에 편히 앉았다. 거실은 봄인데도 난로가 김을 내고 있었다. 올해는 유난히 추운 봄이었다.
“제 복수의 첫 시작이죠.”
“...지윤씨가 도움이 되었다거나, 아니면 무고한 사람이 다쳤기 때문에 구한 게 아니란 말씀입니까?”
“네.”
생각보다 간단한 대답이 돌아왔다. 준구는 길준에게 말했다.
“만약 당신이 하려는 게 복수라면 상대편도 그걸 모른다고 생각하십니까?”
“......”
“지윤씨를 데리고 왔다면 아마 상대편도 알 겁니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 제일 위험한 상태에 처해있는 사람은 당신 어머니일겁니다.”
“...이미 죽었습니다.”
길준이 천천히 말했다.
“난 봤습니다. 모든 걸 알게 되었어요. 더 이상 희망은 없는 겁니다. 단지 복수심만 더 커지겠죠. 그런데 나는 더 이상 복수할 의욕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지윤씨가 한 말이 맞기는 맞는 거죠...내 마음속에는 선의는 없으니까. 그렇다고 안 할 순 없죠. 그 놈도 내가 자기에게 복수하려는 건 알고 있을 테니까.”
순간적으로 따끔한 아픔이 그에게 찾아왔다.
그리고 뒤이어 소리가 들렸다. 짜악!
“실망입니다.”
준구가 길준에게 말했다.
“적어도 상대가 그렇다면 당신은 그래도 인간적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내 착각이었군요.”
“...나는 압니다. 당신이 믿지 않아도...”
“적어도 노력이라도 해야죠.”
준구가 차갑게 잘랐다.
“선의가 없더라도 노력하면 선하게 될 수 있다는 걸 나는 믿습니다. 내가 노숙자였던 시절에 그걸 잘 알게 되었죠. 그들에게는 십원만한 선의가 있었을지라도 내게는 100원같이 느껴졌었으니까요. 그 사람들도 그걸 압니다. 당신의 적도 그걸 두려워하고요. 적어도 내 생각은 그렇군요. 더더군다나 내가 말하는 건 다른 게 아닙니다. 당신 어머니 이야길 하는 겁니다. 그 실체 없는 유령보다도요!”
“.....”
길준은 손만 흔들어보였을 뿐이었다. 준구는 누구에게로 향하는지 모를 분노를 안고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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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와.”
윤희는 창백한 얼굴로 남편을 맞았다. 병률은 초조한 얼굴로 병실을 한바퀴 둘러보았다.
1인실에서 침대에 누워있는 그녀는 곧 사라질 것만 같았다.
“죽은 애가 남자애래.”
병률이 입을 열자 그녀는 이마를 찌푸리면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난 당신만 괜찮으면 돼.”
“...섭섭하지 않아?”
윤희는 남편에게 눈을 맞췄다.
“당신 애야.”
[당신의 두 번째 아이야.]라고 옆에서 유령이 속삭였다.
[살아남지 못한 두 번째 아이야.] 라고 유령이 다시 속삭였다.
“응. 난 당신만 괜찮으면...”
[거짓말이지.]라고 유령이 다시 귓가에 속삭였다.
“의사가 뭐래?”
“별로 특별한 이야긴 없었어. 여기서 한 며칠 더 있다가 집으로 들어가려고. 아 참.”
“응?”
“나...어쩌면 친정에 돌아가서 몇 달 쉴지도 몰라...”
윤희는 어렵게 어렵게 입을 떼었다.
“당신이 제일 바쁠 때 옆에 있어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후보자님. 시간 다 됐습니다. 당회의가 30분 뒤에 있으니 지금 가셔야 합니다.”
눈치 없는 보좌관을 흔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사실은 그도 알고 있었다.
이건 그저 가짜일 뿐이라고.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인은 [유령]이라고.
그가 죽인 유령이라고.
그래서 그는 복수를 시작한 길준에게 분노를 향할 수 있었다.
네가 뭐라고 하건 난 널 죽일 수 밖에 없다고.
그는 병원을 급하게 나서면서 혹시나 싶어 만들어뒀던 대포폰으로 연락했다.
“나다. 그 여자한테 약을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