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이제 다깼는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미축의 얼굴이 보였다. 근심이라기엔 다소 밝은 그 얼굴에 잠시 궁금증이 생겼다.

 

대리는?”

 

대리답게 자네를 잘 짊어지고 왔더군. 그리고 이것도.”

 

미축이 두루마기 하나를 펼쳐보였다.

 

자네가 잃어버린 것이라고 그 친구가 말한 것인데, 그 독을 먹은 건 이야기 안하더군.”

 

?”

 

그 얼굴의 비밀이 잠시 풀렸다.

 

그 독을 먹인 것만으로도 자넨 패설사관직을 내놓아야 했었네만은...”

 

잠깐. 올해 황산 안 갔었나?”

 

그게 중요한가? 왕국의 패설사관이여.”

 

갑자기 격을 붙여 이야기하는 통에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화미인의 초상화네. 자네의 그 유치한 계획을 패설사관부에서 알고 있었다네. 하지만 자네는 왕국의 패설사관을 할 정도로 유능한 자. 그래서 덫을 친거라더군.”

 

내가 급하게 두루마기를 풀자 그 안에서 눈부시게 아름답지 않은 화미인의 초상이 나타났다.

여기저기 기워진 자국이 있고, 낙서도 되어 있는 그 그림은 누가봐도 화미인의 것이 아니라고 할 터였다. 하지만...

 

진품이로군.”

 

궁중에 있던 물건이니까.”

 

미축은 가만히 앉아서 내 얼굴을 살폈다.

 

전에 듣자하니 왕실 패설사관에게 자리를 물려받을 때 꼭 패설사관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고 했었지...근데 이 꼴인가. 고급 관리가 도둑질이라니...”

 

그게 도둑질이라고? 우라질! 황금만 썩어빠지게 있는 자들이 가끔 놀이삼아 찾는 귀한 유물들을 내가 미리 찾아서 간수하는게 뭐가 나쁘다는 건가. 내가 패설사관이 된 이유가 너같은 놈하고 똑같을 리가 없지. 그 이유는 너같은 흔한 사내가 알만한 이유가 아냐.”

 

그럴 줄 알았지.”

 

패설사관 미축은 혀를 쯧 찼다.

 

화미인 초상화는 결국 잃어버린 게 아니었군.”

 

잃어버릴 리 있나. 황제국의 조상 중 한명인데. 소금기둥 이야기는, 지배자의 쉬운 굴종에 의해서 노예가 된 자들이 꾸며낸 이야기지.”

 

근데 그 초상화 잘도 반출시켰군. 일어경에서 나온 말도 짜깁기 한건가. 흔한 사내라는 말 취소하네. 흔하진 않군.”

 

칭찬이 과분하군. 난 아니니까 칭찬할 필욘 없네.”

 

근데 황제국의 조상이라니...왕실 패설사관부에는 없는 도서인데...”

 

이야기는 벌써 붉은 까마귀에게 들었을텐데...”

 

미축이 말을 흐렸다.

 

“...자네도 붉은 까마귀를 아나?”

 

자네가 도적떼를 끌고 다녔던 건 적오에게 들었네. 적오도 이름자를 풀이하면 붉은 까마귀지. 적오가 적당히 손을 써서 도적떼들을 합당한 처분을 해놓았다고 하더군.”

 

그건 요물이잖나. 항상 붙잡고 벌을 주고, 도움은 안 받는다고 하지 않았나! 비겁하게 정정당당하게 승부하지 않고 요물의 힘을 빌리다니!”

자네덕분에 고향을 찾게 되었다더구만.”

 

적오 이야기를 살짝 매듭지으면서 미축은 미소를 지었다.

 

요물이지만, 자네같은 지능범을 잡을 때는 도움도 받아야지. 더더군다나 자네를 잡은 건 적오가 아니니까.”

 

뭐라고!”

 

적오는 그녀처럼 나이가 많지 않다네. 아마 어미를 찾게 된 모양이야.”

 

“.....”

 

흐뭇해하는군. 황산에 가지도 않고, 그 요물년에게 단단히 홀린 모양이지.”

 

“...뭐라 말하든 좋다네. 난 황실의 패설사관이니까.”

 

영혼을 잃은 장교는 어찌 되었나. 영혼을 빨아들이는 돌을 가지고 있다는 적오가 데리고 있지 않았나? 근데 분명히 붉은 까마귀가 그 사내를 데리고 있던데...”

 

그는 여전히 적오와 함께 있다네. 영혼을 돌려달라 했지만 번번히 거절당했네만... 아마 어미가 맞긴 한 모양이지. 적오의 모습을 하고, 그 비슷한 종자를 데리고 다니는 걸 보면...”

 

그래, 대충 상황 돌아가는 건 알았고. 내 처분은?”

 

“...왕께서 처분을 내리시길 기다려야지. 아니면...”

 

미축은 흘깃 침상 저편을 쳐다보았다. 사락거리는 비단천 소리와 함께 옥음이 들려왔다.

 

왕실을 기망하고, 왕실의 물품을 몰래 보관한 죄 위중하나. 패설사관의 단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는 점을 고려해서...”

 

왕비였다.

 

강등하여 왕실 비밀 박물관장이 되게 하라는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후후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단지 지금부터 그대는 세상에 없는 남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 아우들은.”

 

처음으로 왕비에게 반말을 했다. 빈정대곤 했지만 반말은 한 적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반말을 했다. 하지만 처음으로 진심이 담긴, 애절한 한마디였다.

 

목을 베어 햇볕이 쪼이는 곳에 두었지요. 왕과 왕비는 바보일지는 모르지만, 비위를 거스리는 자를 못 알아보진 않는답니다. 그대의 팔을 자르지 않고 그대 팔 노릇 하는 자들을 없앴으니 앞으로는 순순히 박물관을 지키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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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은 그 명이 짧다. 명장 또한 그 명이 짧다. 미인이나 명장은 왕이 아끼지만, 자기 자신의 만족만을 찾기 때문에 미인은 정치놀음에 희생되고, 명장은 두 번 다시 같은 물건을 찾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죽음을 당하게 된다.

나는 손가락으로 새로 들어온 도자기를 매만졌다. 흠결없이 매끄러운 도자기를 나는 손으로 내리쳐 깨버렸다.

 

나으리.”

 

명장이 아니라 특장이라는 명을 받아도 아깝지 않을 젊은이가 겁에 질린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이번에도 형편이 없는겝니까?”

 

“......”

 

패설사관은 수많은 정치와 민초들을 본다. 그 와중에 사그라져가는 역사를 본다. 하지만 나는 그 사건 이후 왕실에 갇혀 왕실에 어울리는 호사스러운 도자기들을 수집한다.

화려한 물건들, 잔인하고 인정사정없는 왕실에 어울리는 물건들을.

 

자넨, 다음주까지 멀리 떠나게.”

 

내 말에 그가 눈알을 굴레굴레 굴렸다,

 

어디로 가란 말씀이신지...”

 

납품받을 건 없네. 자넨 이대로도 장인이니, 멀리 가서 살게나. 자네 솜씨 정도면 먹고 살만할게야.”

 

화미인이 살아남았던 것은 소금기둥이 되어서가 아니라, 왕보다 더한 권력에게 의탁했기 때문이다. 영웅왕은 왕이었지만 원래 신분은 상인이었다.

그런 자가 소금기둥이라는 민담에 힘을 실어주었던 것은 그가 왕으로서 역시 살아남기 위해서 황제국에 무릎을 굽혔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았던 것때문이었다.

그래서 왕실에는 없고 황제국 패설사관부에는 있었던 것이다.

받는 대접이란 바로 그림에 낙서나 그려져 있는 것이었다.

 

먹고 살만하면 그대로 만족하느냐?”

 

어느새 목소리가 바뀌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먹고 사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소. 하지만 형제들을 희생시키고 살았으니...”

 

“...영혼이 없는 자로 살겠구나.”

 

적오의 긴 머리칼이 내 어깨를 스쳤다.

요물이라고 욕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애초에 내게 이 길을 열어주었던 것은 그녀였으니까.

 

가자꾸나. 작은 아이야. 아직 더 넓은 세상을 보아야 할 의무가 네겐 있단다.”

 

그녀의 손을 나는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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