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왕은 마침내 세계 최고의 미인을 아내로 얻었다. 그녀는 본래 마법사로 영웅왕의 적이었지만 끝내 영웅왕에게 패하고 말았다. 그녀를 아내로 얻기 위해서는 그녀의 본명을 알아야 했다. 그것도 그녀 스스로가 입을 열어서야만...
그래서 그녀는 최후의 순간, 영웅왕에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들어 그 아름다운 입술을 열었다.
“왕이시여...제 이름은...”
그녀가 첫 자를 읊기 무섭게 그녀는 그대로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다.
영웅왕은 그녀의 마법의 무서움에 치를 떨며 그녀와 그가 혼약을 맺으려던 그 광장을 소금을 잔득 부어 버리고 말았다...
물론 마법사인 그녀의 형체도 산더미같은 소금에 묻혀 비가 내린 후 씻겨버리고 말았다.
“가끔은 이야기도 좀 하고 그러게나.”
왕은 가끔 내게 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넨다. 하지만 굉장히 귀찮은 일이다.
나는 더운 것도 질색이고, 추운 것도 질색이다. 더더군다나 귀찮은 것은 더욱 질색이다.
“전하. 전 무척 더워서 이야기를 할 기력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무료하니 이야기를 들려달라 엉겨붙는 백성들도 질색이고, 왕도 질색이다.
왕은 바보니까 우리 맘대로 해야지. 라고 생각하는 고관들도 질색이다.
“왜 항상 자네는 여기서 가만히 있는 건가?”
“바보들이 없으니까요.”
나는 그렇게 틱틱거리고는 다시 고서에 파묻힐 준비를 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리고 한없이 귀찮기도 해도 나도 패설사관인만큼 일을 안할 수가 없다. 더더군다나 이건 내가 하는 일 중에 가장 덜 힘든 일이다. 귀찮지도 않고.
“바보라면 나도 포함되어 있는가?”
“훌륭하게 잘 아는 사람을 바보라고 할 순 없죠.”
나이는 서른을 넘었는데도 아직도 아이처럼 이야기에 탐닉하는 왕을 훌륭하다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다. 날 죽인다고 해도 마찬가지.
“자네는 항상 이상한 말만 하는군.”
오늘은 다행히 이말저말 하지 않고 돌아가려는 채비를 하는 모양이다. 나는 형식적으로 고두한 후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미로같이 길이 얽혀 있는 궁중에서 유일하게 시원한 장소가 서고다. 책을 보관하기 위해서 가장 적절한 온도와 재질을 구현하고 있는 이곳은 잠들기에도 좋은 장소라서 아까 전의 그 바보왕이 가끔 놀러오기도 하는 곳이다.
“자...아까 전에 나왔던 소금기둥이...어라.”
눈을 들어보니 왕비와 눈이 마주쳤다. 5년전 후궁으로 들어왔다가 전 왕비가 죽으면서 그 자리를 이어받은 소녀였다.
“흥미로운 이야기네요.”
“아, 바보왕에 이어서 바보왕비까지...귀찮군요.”
대놓고 말했지만 그녀는 생긋 웃기만 했다. 의외로 왕과는 달리 그녀는 무서운 구석이 있다. 그래도 정면에서 말하는 것까지는 괜찮다. 그녀가 이렇게 웃을 때는 심한 말도 받아준다는 이야기니까.
“소금기둥은 물에 녹아버렸다고 들었는데...조사를 하는 건 무엇때문이죠?”
그녀는 쉽게 돌아갈 생각은 없는 듯 했다. 분홍빛의 앙증맞은 손톱이 책상을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소금기둥이 문제가 아니라 요즘 영웅왕의 모험을 해보고 싶다면서 지역을 휩쓸고 다니는 도적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마.”
“아아. 그 도적들 이야기라면 들어본 적이 있어요. 평소에는 황제국에 싣고 가는 소금 상인들이라면서요.”
황제국에는 수많은 제후국이 있는데, 이곳도 그런 곳 중의 하나이다.
걔중에는 영주국 정도로 되어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곳은 황제의 아들과 딸들이 물려받은 곳이어서 왕국으로 인정받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황제의 쌍둥이 형제가 물려받은 곳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래서 가끔은 쌍둥이 왕국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네. 종적을 알 수가 없어서 황제국의 패설사관이 제게 협조를 요청해 왔습니다.”
“아...”
“요즘 그 패설사관도 바쁜 모양입니다. 여기저기 도적들이 날뛰니 말입니다.”
“당신도 바쁜가요?”
그만 놀아! 라는 어조로 왕비가 말했다.
“제 할 일을 해야죠. 며칠 뒤에 황제국에서 서신이 오면 곧 출발할 예정입니다.”
“호...사람이 몇 명 더 필요하겠네요.. 일이 시작되면 전하나 저에게 말을 해주세요.”
왕비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더니 살짝 치마를 들어올린 후 방을 나갔다. 나는 역시나 고두를 하고는 이내 자리에 들어왔다. 골치아픈 노릇이었다. 왕과 왕비의 간섭이 시작될 모양인데다가, 협조를 요청한 패설사관은 다른 일 때문에 공석이니...
“혼자서 해봐야갰군.”
왕비나 왕의 자리에 비하면 그들의 태도는 한없이 소탈하지만, 그게 모든 귀찮은 일의 시작이었다. 아무쪼록 윗사람이라면 아랫사람에게 신경을 덜 쓰는게 도와주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