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당신과의 거리는 한뼘입니다. 나는 거리를 재면서 대꾸했다. 한뼘이라기엔 너무 멀지 않나. 아니오 한뼘입니다. 그는 미소를 지우면서 의자를 쾅쾅거리면서 옮겼다. 자넨 계산광이군. 나는 테이블에서 그와의 거리를 좀 더 두면서 대꾸했다. 그렇다. 그 이야기를 할 때 그는 웃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이라도 죽이려면 죽일 수 있죠. 그는 손가락으로 거리를 재는 시늉을 했다.

자네 미친건가? 내 말에는 그가 고개를 저었다. 미치다뇨. 놀랄 정도로 멀쩡합니다.

저 밖에서 약혼녀가 전전긍긍하면서 기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섬세한 그녀니만큼 이 불청객이 나만큼 불편하리라.

그런데 왜 어제부터 줄곧 내 말에 시시비비를 가리고, 이렇게 사람을 괴롭히나. 정 싸우고 싶다면 피하지는 않겠네. 나는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면서 말했다. 내 손을 쳐다보니 몸은 거짓말을 안 한다더니 그 말이 맞는 말이다. 불불 떨리고 있었다.

 

 

한뼘이면...나는 말을 흐렸다. 자네같은 군인은 나 정도는 쉽게 죽일 수 있겠군. 더더군다나 자넨 나이프의 달인이잖나. 글쎄요. 그가 말했다. 룰렛으로 정한다면 한뼘이든 반뼘이든 상관없겠죠. 나이프로 하는 건 생각을 못해봤는데 감사드려야겠군요. 하지만 전 룰렛에도 운이 따르니까요. 도대체 날 이렇게 괴롭히는 이유는 뭔가. 어차피 내일이면 결투의 결말이 정해질텐데. 오늘 하루만이라도 날 조용히 내버려둘 수 없나? 내 약혼녀에 대한 무례와 나에 대한 무례는 그만두고 말일세. 내 말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본심은 그렇지 않습니다. 전 그녀에게 빠져있었을 뿐이에요. 당신에게는 별 유감없습니다. 아마 상대방만 바뀌었을테죠.

그렇다면 원하는 건 그녀인가? 아니오. 딱 떨어지는 대답을 하는 걸 보니 별로 생각을 안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 주변 사람들을 이렇게 번거롭게 하나. 결투는 내일인데, 아직까지 종목도 정하지 않고, 그렇다고 그나마 내가 홀로 즐길 수 있는 오찬에 끼어들어서 이렇게 기분을 망치냔 말일세.

기분을 망칠 생각은 없었습니다. 군인은 그렇게 대답했다. 그냥 마지막을 맞이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니까요. 그건 내일이잖나. 하지만 용감하게 대처하는 민간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도 그 전날 뿐이죠. 내일이 되면 시체가 될테니까요.

 

 

한뼘을 사이에 두고 그가 전채요리를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얼굴만으로만 보면 교양있고

세련되고 순진해보이는데 벌써 여자문제로 결투를 한 것만도 10번이 넘어가는 희한한 종자였다. 그래서 내일은 어떻게 하기로 했나. 비가 오면 나이프를, 비가 안 오면 총으로 하죠. 흐리면 룰렛으로 하고. 한가지로 통일하게. 내 말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 편이 더 좋은데요. 이건 의식입니다. 항상 그래왔어요. 당신 때문에 이제 와서 바꿀 수는 없는 거죠.

자네의 기분상이라면 아마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그런 괴상한 걸 생각해낸 걸 깨닫고 머리를 쥐어뜯을 걸세. 도대체가 날이 흐렸다가 비가 왔다가 개기라도 하면 어쩔 생각인가. 지금이라도 결투는 포기하게. 도대체가 자넨 진지하지가 않아. 어설프게 거기 말려든 나도 문제지만. 결투를 포기한다는 것은. 그가 대꾸했다.

그 여자가 없다는 걸 전제로 하는 거지요. 그녀가 있는 한 전 포기 안 합니다.

당신과는 그녀가 없었다면 좀 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 텐데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채요리는 어느새 깨끗이 사라지고 없었다.

군인은 항상 배가 고프죠.

내가 죽으면 그녀와 결혼할건가? 설마요. 그가 말했다. 연인의 원수와 결혼하려는 여자는 없지요. 그건 저보다 당신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럼 대체 이때까지 한 짓거리들은 뭘 위한 거란 말인가. 내 말에 그가 다시 빙긋 웃었다.

거리를 재는 겁니다. 그가 군화발을 탕 하고 바닥에 내리쳤다. 거리라고?

네. 전 결투장에 그 여자들을 데려오죠. 항상 이길 자신이 있으니 데리고 오는 거지만.

그러면 그녀들은 그 과정 하나하나를 다 보게 되는 겁니다. 어떤 여자는 기절하죠. 그럼 간이 작은 여자는 군인과 결혼할 수 없으니 제외. 어떤 여자는 피를 흘리는 걸 보고 감격해합니다. 그럼 잔인하니까 이 여자도 제외. 또 어떤 여자는 중간에 말리려고 끼어듭니다. 하마터면 더 크게 사건을 칠 수 있었을테니 별난 성격의 여자라서 제외. 그렇게 거리를 잽니다.

항상 전 승리했고, 그 중간중간 여자들의 진심과 거리두기도 보았죠. 또 어떤 여자들은 자기와 결투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고 내 초청을 받아들이지 않기도 하죠. 그럼 이 여자들은 무심하니 제외. 당신의 약혼녀는 어느 쪽인지 모르겠군요.

 

 

 

그딴 걸 위해서 살다니 자넨 역시 별종일세. 그럼 이제 가보겠나? 나는 오찬을 마저 즐겨야 하네. 자네에게도 자리를 마련해주고 싶지만 한뼘이니 반뼘이니 하는 소리는 별로 즐겁지가 않아서 말이야.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살짝 까닥이고는 사라졌다.

그 한뼘론 때문에 기분이 상했지만 나는 전채 요리를 적당히 넘기고, 적당하게 구운 고기를 썰기 시작했다. 붉은 양념이 피같아서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그의 말도 일리가 없진 않았다. 정말 나의 그녀가 그의 말처럼 그런 여자라면 확실히 결혼을 제고해 볼 필요는 있는 셈이었다. 그걸 내 목숨을 바치고 해야 하는 것이 문제지만. 그때 방문이 벌컥 열리면서 그가 다시 들어왔다. 밖에서 약혼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또 그녀에게 무례한 짓을 했을 터. 나는 노기를 띠고 그를 노려보았다.

 

 

 

결투는... 그 말을 잇기도 전에 탕! 하는 소리가 들렸다. 군인은 머리에서 피를 흘리면서 쓰러졌다. 총! 그와의 대결을 위해서 내 방에 잘 닦아놓았던 권총을 그녀가 가지고 온 것이었다. 도대체 왜 당신이? 그의 말에 그녀가 대꾸했다. 어제 당신이 내게 한뼘이면 충분하다고 했었죠. 이건 한뼘이 아니라도 되는 군요. 총은 처음 써보는 건데 명중을 했으니 다행이에요. 이건 살인이야. 내가 말했다. 당신을 구한 거예요. 그녀가 대꾸했다. 당신은 펜이나 다루는 문학가인데 어떻게 군인보다 더 잘할 수 있겠어요? 그러는 당신은? 이건 정당방위에요. 난 다른 사람들에게 그가 날 괴롭혔다고 말할테니까. 그가 날 건드리려고 했다고 말하면 다들 믿을 거에요. 군인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맞아요. 그 방법이 있었군요. 당신이 아니라면 약혼자는 내 손에 죽었을 테니까. 이런 답도 있군요. 날 결혼식 제물로 삼은 아가씨. 내가 한마디만 하죠. 당신은 앞으로 영원히... 한뼘을...

그 말을 다 하기도 전에 그는 숨졌다. 그리고 난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사건은 사고사로 처리되었고(워낙 악명높은 인물이라) 나와 그녀는 그 사건이 일어난지 일주일 뒤에 결혼했다.

결혼식 장에서 나는 아내의 손을 잡았다. 차갑고 부드러운 손은 살짝 내 손을 잡았다가 이내 밑으로 떨어졌다. 한뼘의 차가 있었다. 그녀와 나 사이에 한뼘.

앞으로 이 비밀을 안고 살아야 하는 그 한뼘이 아직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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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은 러시아. 대위의 딸이 나오는 그 시대 정도쯤으로 잡고 있습니다.

모델은 푸쉬킨과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조시마 장로입니다. 조시마 장로의 결투 에피소드 부분을 변형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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