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잔 하시겠어요?”

 

그들이 만난 건 [태인]이라는 카페였었다. 그는 그날따라 자주 애용하던 스타벅스에 자리가 없어서 [태인]에 와 있었다. 태인은 운이 없는 카페 중 하나였다. 원래도 그렇게 손님이 많은 카페는 아니었는데 운이 나쁘게 [스타벅스]가 옆에 생기면서 손님들이 거의 다 떨어뎠던 것이다. 그렇다고 슈퍼 바리스타가 있는 것도 아니니, 이렇게 스타벅스에서 밀려나오지 않는 한은 항상 한적했다.

 

그가 주문한 커피를 후루룩 마시고, 노트북을 켜서 작업을 증간정도 했을 때였다.

그 목소리가 들려서 그는 우선 노트북에 꽂아놓았던 눈을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돌렸다. 눈만.

 

죄송하지만 싫습니다.”

 

아니, 눈보다는 목소리가 먼저 대답했다. 그 다음 눈이 그 상대방을 응시했을 때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차 한잔 저랑 같이...”

 

그는 깜짝 놀랐다. 그건 토끼였다. 그것도 그의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 토끼.

소설 속에서 주인공 토끼는 보름달이 뜨는 밤, 차를 마시고 컵에 남은 차무늬를 보고 운명의 상대를 결정한다고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그 토끼는 고향을 떠나 같이 차를 마실 사람을...

 

아니, 왜 하필 나를...”

 

“...소설가시잖아요. 제 운명을 결정짓는...”

 

그가 적은 부분은 운명을 찾아 떠나온 토끼가 한 남자에게 차를 같이 마시자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 토끼가 맹랑하게도 페이지를 탈출한 것이었다.

 

“......”

 

전 이대로 사라질 수 없어요.”

 

뭔 뜬금 없는 소리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는 알았다.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이 토끼는 위대한 일을 이루어낸 후 갑자기 사라지는 결말을 정해놓았다.

 

“......”

 

사라지는 이유는 간단했다. 차를 같이 마실 사람을 구하지 못해서였다.

 

왜 하필 나를...그런다고 내가 네 결말을 바꿀거라고 생각해?”

 

그럼 왜 하필 제가 사라져야 하죠?”

 

태인의 무심한 주인장은 토끼가 말을 하는데도 아무 변화가 없었다. 심지어 카페에 따로 찻잔과 차를 들고온 토끼가 있는데도.

 

잠깐만. 어째서 네가 사라진다고 생각해? 결말을 바꾸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네가...”

 

거짓말이지만, 사실 비슷한 이야기기도 했다.

결말은 정해놨지만 결말까지 가는 중간 내용은 구상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결말을 읽고 왔으니까요.”

 

“...?”

 

위대한 토끼는 응차~ 라는 신음소리를 내면서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앞의 빈 공간을 향해서 앞발을 내밀었다. . 하는 소리와 함께 토끼의 앞발에 어울리는 작은 책이 떨어져내렸다.

이걸 읽었죠. 2014611쇄 찍은 책이에요. 제목은 위대한 토끼에 대해서 말하다.”

 

“....잠깐만 그거 이리...”

 

 

줄거리 변비와 아이디어 고갈로 숨이 목에 찬 그가 토끼가 꺼낸 책을 뺏으려고 한 순간.

토끼는 잽싸게 또 빈공간을 향해서 그 책을 던져넣었다.

 

안돼요. 이걸 보면 그대로 쓰실 거잖아요.“

 

!”

 

저랑 차 마셔주시면 보여드릴게요.”

 

토끼는 우아한 자세로 티포트와 어디서 가져왔는지 알지도 못하는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올려놓았다.

 

저랑 같이 차 마셔요.”

 

좋아.”

 

스토리 변비와 우울증에 가까운 아이디어 고갈증상을 보이던 그는 결국 승낙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감일은 얼마 남지 않았고, 그는 이번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이 계열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었다.

 

차는 무슨 차야? 기왕 마시는 거 복숭아차로 줘.”

 

.”

 

토끼가 앞발을 들고 찻잔을 그에게 주었다. 앙증맞은 찻잔을 보면서 그는 한숨을 쉬었다.

단지 먹고 살기 위해서 이제는 소설속의 주인공에게 협박까지 당해야 하다니...

 

근데 이상한데?”

 

?”

 

오늘은 보름이 아닌데?”

 

“......”

 

토끼는 잠깐 생각하는 듯 하더니 빙긋 웃었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다 마시시면 그 책 보여드릴게요.”

 

그리고 그에게 복숭아차를 내밀었다. 그는 기분이 찜찜했지만 홀짝 한 모금 넘겼다.

 

뭔가 속는 기분이...”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태인의 주인장은 그가 사라진 의자를 바라보다가 잠시 그 자리에 앉았다. 그 자리에는 아까전까지 열심히 타자를 두드리던 그가 있었다. 태인의 주인장은 토끼도 봤지만 워낙 무심한 성격이어서(아마 그래서 연쇄적으로 들어왔던 스타벅스나 핸즈커피를 당해내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간단하게 토끼를 향해서 말했다.

 

리필?”

 

“.....”

 

토끼는 고개를 까닥였다. 그리고 아까 전까지 남자가 쓰던 노트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토끼가 계속 뭔가를 칠수록 노트북 화면은 마치 지우개로 지운것처럼 내용이 사라져갔다.

 

“......”

 

토끼는 계속 내용을 두드렸지만 아무것도 입력되지 않았다. 남자가 사라지면서 남자가 쓴 내용은 몽땅 다 사라져버렸다. 심지어는 토끼의 몸도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주인공의 행동이나 내용을 쓰는 것이 소설가였으니 토끼가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토끼는 사라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앞발을 빈공간으로 내밀었다.

그 빈공간이 열리면서 아까전에 토끼가 소설가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그 책이 나타났다.

하지만 토끼가 앞발로 그 책을 집어들면서 책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토끼는 울면서 사라졌다.

 

리필?”

 

그는 꿈에서 깨어났다. 어느샌가 노트북을 베고 잔 모양이었다. 그는 머리를 북북 긁다가 무심한 [태인]의 주인장을 향해서 졸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메리카노로.”

 

...”

 

그는 아까 전에 한 사분지 일 정도 두드리던 내용을 찾았지만 노트북에서 모든 내용이 깔끔하게 지워져 있었다.

 

. 큰일났다. 내일 모레 마감일인데. 쓴 부분도 몽땅 다 지워졌어.”

 

“......”

 

결국 그에게 남은 건 달콤한 한순간의 낮잠과 텅텅 빈 노트북 화면 뿐이었다.

그는 리필하고 남은 아메리카노를 여유있게 마시는 주인장을 흘끔흘끔 부러운 눈으로 보면서 다시 내용을 치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이 그 낮잠의 내용이 그에게 막힌 스토리의 맥을 잡아준 것이었다.

그는 무심한 주인장이 있는 카페에 등장한 토끼 이야기를 소설로 썼고, 그 소설은 본래 나오기로 한 출판사에서 진통을 겪다가 출판사를 바꾼 이후 소설에서 동화로 바뀌어서 책이 나왔다. 바로 201461일 일쇄를 찍은 바로 내 손에 들린 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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