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악몽을 꾸었다. 자신이 뒤에 있는데 아내가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가 총을 맞는 꿈.

그리고 웃는 범인, 얼굴을 자세히 쳐다보자 그게 그 놈이었다.

 

!”

 

그는 비명을 질렀다. 도대체 언제쯤에야 이 악몽이 사라질까. 그놈을 죽여버린 후에? 아니면 모든 걸 포기하고 아내를 잃은 상처가 아문 뒤에?

그는 땀을 닦아낸 후 옷을 갈아입었다. 아내가 촌스럽다고 하던 녹색무늬 체크 남방. 약간 검정기가 도는 갈색 바지.

병률의 아내 윤희가 밥이라도 한끼 하자고 한게 오늘 오후였다. 몸이 안 좋다고 하니까 남편이 차를 몰고 데려오겠다고 했다.

 

그 사람이 길준씨 걱정 많이 해요...저도 걱정 많이 되고요. 이럴때일수록 잘 챙겨 먹어야 하지 않겠어요?”

 

말만으로 그치지 않고 윤희는 병률편에 음식을 보내주겠다고했다. 그는 반찬 가게에서 사먹고 있다고 대답하고 거절했다.

아마 오늘도 병률의 집에 가면 윤희가 또 그 말을 할 것이이다.

 

딩동.

 

오후 6. 병률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문을 열고 다시 부엌의 칼을 쳐다보았다.

위태롭게 놓여있는 게 꼭 지금 그의 마음 상태같았다. 그는 날붙이를 쳐다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런 때일수록 침착해야 했다.

 

벌써 준비하고 있었어? 난 좀 걸릴 줄 알았더니.”

 

병률이 현관문을 열자마자 말했다.

 

가자. 우리 집 사람이 지금 맛있는 거 많이 해놨어...”

 

길준은 대답 없이 운동화를 발에 꿰어 신었다. 도대체 왜 이 놈은 살인 직후에 이렇게 길준을 챙기는 것일까. 양심이 캥겨서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까.

어쩌면 자신을 증오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까지 밝혀낸 바에 의하면 병률이 자신을 괴롭혀야 할 이유같은 건 없었다.

 

왜 그런 얼굴로 쳐다봐. 얼빠진 사람처럼. 어서 가자.”

 

병률이 자신의 손을 잡고 끌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진. 아직까진.

참을 수 있다. 이 역겨움을.

그는 걸어나오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보인다. 아내의 환영이.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한번 바라보다가 다시 손가락을 병률에게 향했다.

잊지 않았다. 잊을 수도 없었다. 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는 병률의 소나타 옆자리에 앉았다. 병률이 힐끗힐끗 자기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얼굴에 복수심이라도 드러난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병률의 죄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것을 병률도 눈치를 챈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지혜를 잃은 자신의 상심이 큰 것을 병률이 신경쓰고 있어서일까...

다 아니라면 자신이 병률을 관찰하고 있다는 걸 병률이 불편해해서일까.

 

뭘 그렇게 보냐. 언제 한번도 안 봤던 사람 모양.”

 

정곡이었다.

그는 병률의 목걸이를 보고 있었다.

언제나 보던 것이지만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십자가 목걸이.

만약 신이 있다면 자신의 복수를 정당하게 받아줄 것이다. 십자가.

과연 이놈에게 어울리는 모양이란 말인가.

 

...아무것도 아냐.”

 

저런 놈도 기도를 하겠지. 신앞에서 땅속에 피를 흘리고도, 아침 식사기도도 할 것이고 교회도 꼬박꼬박 다닐 것이다.

실한 기독교신자로서, 믿을 만한 동료로서 함께 했던 그를 생각하면 구토가 나올 지경이었다.

이때까지 속아온 건가 싶었다.

병률은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길준이 늘 알던 익숙한 기도문을 읋조리기 시작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길준은 주먹을 꽉 쥐고 병률의 기도문을 들었다. 그리고 기도문이 끝남과 동시에 차는 경쾌한 소리를 내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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