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점(1)
금발에게 다가가지 마세요.
그녀는 멍청하고 골이 비었거든요.
결혼하려면 갈색머리와 하세요.
그리고 빨강머리를 언제나 그리워하세요.
그런 노래가 흘렀던 것 같다. 대학시절 처음 사귄 남자친구와 들렀던 매장에서. 영어를 잘 못하는 남자친구는 못 알아들었지만 난 금방 알아들을 수 있었다.
여자를 대상화 삼는다고 항의할 수도 있었지만 그냥 가만히 있었다. 하필이면 왜 그 때 내 머리가 노란색이었을까...하고 생각하면서.
"다 끝났다. 어때 이 신발 괜찮지?"
나이키 운동화를 사면서 해맑게 웃던 그 남자친구와는 얼마 안되어서 헤어졌다.
꼭 그 노래때문은 아니었고, 쇼핑 다닐때마다 따라다녀주는 남자친구가 흔한 것도 아니었다.
좀 아깝긴 했지만 어쨌건 안 맞는 사람과는 계속 다닐 필요가 없다는 게 내 지론이었다.
그리고 그 앨 처음 만났다. 정말 금발이 잘 어울릴법한 여자아이.
그때엔 내 머리가 이미 노란머리가 아니라 갈색으로 물들여져 있었다.
"어떻게 나랑 헤어진다고 이야기할 수 있어."
실연당하는 장소에서 펑펑 우는 여자아이가 그렇게 흔하건만. 왜 나는 분홍색 옷을 입고 우는 그 아이에게 금발이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을까.
나는 얼마 뒤에 그 아이하고 친해졌고, 쇼핑 다닐때 어느 순간 그 애 손에다가 금발 염색약을 쥐어주었다. 그렇다고 그 매장에서 들은 노래처럼 비하할 의도는 없었다. 그냥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그랬을 뿐이었다.
"잘 어울려?"
노란색으로 물들이고 온 그 아이의 말에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잘 어울렸다.
전체적으로 흰 얼굴에 노란머리가 아주 잘 어울렸다. 흡사 마릴린 먼로를 보는 것 같달까.
얼마뒤부턴가 그 애 주위에는 다시 남자들이 들끓기 시작했다. 금발 때문인건지 아니면 그 맹한 성격때문인지. 하긴 여자아이들도 주변에 많이 있긴 했다. 워낙 패셔너블하게 해가지고 다니니까. 금발은 거기에 화룡정점이었고.
그래서 어느날 결혼한다고 했을 때 내가 그렇게 놀란 것이었을까.
마릴린은 여러번 결혼하고 이혼했다. 그 전철을 이 아이도 밟을까봐 걱정된 탓이었다.
걱정은 무슨.
금발은 내가 그냥 손에 쥐어준 염색약때문이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 앤 결혼을 아주 무난하게 잘 하고 있었다. 그 남편이란 사람이 실직을 밥먹듯이 해서 문제지.
그것만 빼면 그 앤 두 아들을 슬하에 둔 채 아직도 잘 살고 있었다.
그 노래의 최면효과때문에 나는 아직도 그 앨 보면 가슴이 덜컹거린다. 이제는 더 이상 금발도 아니고, 아이도 둘이나 있는 아줌마인데.
하지만 난 아직도 갈색머리이고 결혼을 하지 않았다. 결혼에 목매고 싶진 않지만 부러운 건 사실이다.
원점(2)
빨강머리 앤은 왜 그 매력적인 머리카락을 포기하려고 했을까. 난 항상 그게 의문이었다. 타는듯한 붉은머리 멋지지 않은가?
나는 그래서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빨갛게 염색을 했다. 대학시절이 좋은 건 단 한가지 때문이다. 자유. 고등학교 시절에는 누릴 수 없는 바로 그것.
"빨갛게 염색했네. 안 어울린다."
내 친구들 중에는 여러명의 종류의 인간들이 있다. 염색약을 선물하면서 너랑 잘 어울릴거라고 말하는 친구도 있고, 기껏 염색하고 나타나면 안 어울린다고 말하는 갈색머리도 있고...
"내 맘이거든요, 참견하지 마시죠."
그래도 친하니 용서한다. 하긴 뭐 별 문제도 아니니까.
속으로는 약간 고소해하기도 하면서. 그 갈색머리는 사실 염색으로 만든 가짜니까.
실제로는 붉은 기가 강하게 도는 갈색이다. 워낙 붉은 기가 진해서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혼도 많이난 모양이었다. 그래서 갈색으로 물들이다가 얼마 전에는 노란색으로 물들이고 다녔다.
물론 원래 머리카락 색이 붉으니 염색도 잘 먹지 않아서 색깔이 영 희한하게 나왔지만.
얼마동안 원래 머리카락으로 돌아가나 했지만 얼마 뒤에는 갈색으로 염색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왜 그 예쁜 빨강머리를 포기했는지 의문이었다.
그래도 고등학교때 이야기를 하면 안된다. 그거 엄청난 트라우마니까.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훨씬 뒤의 일이다. 붉은색 머리카락은 날라리로 보인다고. 그렇게 노는 여자처럼 보이기 싫다고 언젠가 다른 친구에게 말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한번 그 문제로 실연당한 일이 있는가보다...
라고 생각할 따름이다.
원점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