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진진우는 무덤 저편에서 그 두사람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숨어있을 정도로 멀지만 그렇다고 내용을 다 못 들을 정도로 멀지도 않았다. 되도록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재벌 후계자님은 억지로 몸을 구부렸다.

 

"도대체 왜 그러는지 설명 좀 해줘. 날 아직도 친한 친구라고 생각한다면 이야기는 해줄 수 있잖아. 항상 날 피하려고만 들어. 요 최근에 계속. 편지도 보냈는데 답장도 없고..."

 

"편지라니?"

 

"편질 못 받았다는거야?"

 

"아이돌이 편지 챙길 정도의 시간은...아..."

 

그제서야 승아는 그 편지가 누구 손에 의해서 정리 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멀리도 갈 것 없는 단 한 사람.

 

"도대체 왜 그 남자한테 매여있는거야? 기사대로 하자면 내쪽으로 와도..."

 

"정말 네 소속사가 맞는 거야?"

 

그녀의 말에 중우가 솔직하게 말했다.

 

"아니. 하지만 내 이름으로 운영될 회사야.그러니까 너 하나쯤은..."

 

"난, 네 소속사에 가지 않아."

 

"왜!"

 

급기야 중우는 분통을 터뜨렸다.

 

"그 남자는 비뚤어졌어. 그런 놈이랑 함께 있다가는 너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세상에 팬이 보낸 편지를-그 남자는 날 팬으로 알테니까-일괄 수거해서 버리는 인간이 어디있어? 나하고 같이 일하자. 우린 옛날부터 친한 친구였잖아."

 

"......"

 

승아는 조심스럽게 묘지의 석판에 손을 갖다댔다. 차가운 감촉, 덤덤한 감촉은 그녀에게 길원택을 생각나게 했다. 그와 키스할 때조차도 감각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그녀의 감각은 차가워졌지만, 그녀를 향한 그의 감정은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것을.
화상입은 쪽의 피부는 더욱 뜨거웠다. 스튜디오에서 순백의 웨딩 드레스를 입고 노래할 때 보이던 그의 미묘한 떨림. 거부하고 싶지만, 우선은 그녀에게 그 자리를 마련해 준 것은 길원택. 바로 그 사람이었다.

 

"난 그 분의 노래로 살아. 알지? 소속사가 아무리 잘해도 곡을 잘 받지 않으면 살지 못해. 대표님은 그 모든 걸 해결해주시는 분이야."

 

"거짓말 하지마!"

 

중우는 자신의 맘대로 승아가 움직이지 않자 발칵 화를 냈다.

 

"넌 아이돌일 뿐이고, 그 사람은 그냥 사장일 뿐이야. 그저 한창 때 이용해 먹으려고 하는 것 뿐이라고."

 

"틀린 말이 아닐지도 몰라. 하지만..."

 

아버지의 발작 이후, 아버지는 병원비를  더 낼 형편이 없어서 병실 한 구석에서 퇴원만 기다리고 있어야했다. 수술을 해야 하는데 수술비가 없었던 탓이다.
진중우의 집이 부자라는 걸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고, 그래서 소녀는 자주 병원에
병문안 하러 오는  그 아버지에게 부탁할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하긴, 그 부자는 억지로 병문안을 오는 것 같았으니까. 오는 목적도 한결같았다. 중우와 그녀를 떼어놓기 위해서.
그러던 어느날, 무명의 독지가로부터 병원에 결제가 끝났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급히 수술날짜가 잡혔지만 수술은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승아는 그때 독지가가 보내준 쪽지를 잊을 수가 없었다.

 

[네 목소리가 천사같아서 하나님이 상을 주시는 거야.]

 

그리고 그 이후부터 승아는 마음 속에 항상 음악을 꿈꿨다.
 
"네가 내 마음을 어떻게 알겠어! 대표님은..."

 

"왜 내 앞에서 그 사람 편을 드는 거야."

 

"....넌 부잣집 아들이야. 나보다 더 좋은 여자들도 주변에 있을 테고...그래 넌 제대로 봤어. 난 대표님을 사랑하지 않아."

 

그 말에 한쪽 켠에 있던 [유령]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내 꿈은 훌륭한 가수가 되는 것이고, 대표님이 함께 있다면 우리 둘은..."

 

길원택도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드디어 승아가 자신의 진심을 이해해 준 것이었다.
그는 그녀의 사랑같은 거 안 받아도 좋았다. 미움을 받아도 좋았다. 그저 그 목소리로 지저귀는 작은 새가 떠나지 않기를. 그저 바랄 뿐이었다. 옛날에 병원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를 다시 한번 듣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아버지가 말씀하셨지. 넌 정말 천사같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구나... 돌아가시기 전에..., 날 도와주신 그 분도 그렇게 말씀하셨지...넌 꼭 노래를 하거라. 그래. 이 길만이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야. 자, 이게 무덤앞에서 내가 말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대답이야."

 

진진우는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겨우 참고 있었다. 무덤가까지 와서 이야길 한다길래 무슨 이야긴가 했더니만, 겨우 아기 수준의 대화를 나누고 있지 않은가!
입을 겨우 틀어막고 보디가드들이 기다리는 차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그의 바로 뒤에 있던 [유령]과 마주치고 말았다.

 

"아니,넌..."

 

"참 오래간만이군요. 사장님. 근 10년만이던가요...밀수 사건이 있고 나서..."

 

목소리를 확인 하고 나서 진진우는 자리에 주저앉을 뻔 했다. 하지만 [유령]과 길원택은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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