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직업 잔혹사 - 문명을 만든 밑바닥 직업의 역사
토니 로빈슨.데이비드 윌콕 지음, 신두석 옮김 / 한숲출판사 / 2005년 10월
평점 :
품절


오래간만에 기겁을 하며, 괴성을 지르며, 데굴데굴 구르며 독서를 했다. 물론 나의 감정표현 방식이 유별나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래, 표현 수위의 개인차는 있겠지만! 한 번의 동요, 한 번의 찡그림 없이  담담히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실제로 못견딜만큼 잔혹하고 역겨운 내용만이 가득한 책은 아니니 걱정마시고)

이 책의 내용은 무척 궁금했지만 불량직업 잔혹사라는 제목이 꽤 유치하게 들려(이런 저런 영화 드라마 제목을 합쳐놓은 것 같지 않은가?) 살까 말까 오랫동안 고민 했었다. 이것저것 골라 카트에 넣다 할부 5만원 채우려고 덤으로 주문해는데, 오 사길 정말 잘했다.

왕족, 귀족이 주인공인 역사물만 보다가 궁녀, 의녀가 주인공인 대장금을 봤을 때 신선하지 않았는가? 불량직업 잔혹사는 빛나는 영국 역사의 전면에 드러나지 않은, 어두운 밑바닥 직업인들의 이야기가 주요내용이다. 게다가 단순히 고된 직업만을 열거한 것이 아니라 과거부터 시간순으로 부드럽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수련 수도사 다음은 수련 수도사들 중에서도 가장 힘겨운 필사본 채식사 그리고 그 다음은... 이런 식으로 각 장이 느슨히 이어지기 때문에 한 번 잡기 시작하면 호기심에 좀처럼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다. 더구나 각 시대별로 특징적인 직업을 다뤘기 때문에 부족하나마 영국 역사의 흐름을 생각하면서 읽게 된다. (매 챕터마다 간단히 시대 조망이 언급되어 있다)

판형도 큰 편이라 시원시원하고, 컬러 도판이 많이 실려있다. 근래 읽었던 책 중에 도판이 책 이해에 이렇게 도움이 된 적이 없었던 듯 하다. 저자가 과거의 불량직업을 직접 재현해보고 찍은 사진들은 최고! 처음 사서 책을 훑어봤을 때 머리 하얀 아저씨 사진이 계속 나오기에 모델이 그렇게 없나 했더니만 알고보니 저자가 물고문이며 썩은 오줌통에 발 담그기 따위를 직접 실행해 보고 촬영한 사진이었던 것이다. 사진만 보고는 저자가 얼마만큼 성실히 그 직업의 노고를 체험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불량직업의 고충에 관한 저자의  평가가 사진을 통해 더욱더 힘을 얻게 되는 건 사실이다.  '수백년 전에 이역만리 타국에서 그런그런 직업이 있었단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과 '현대의 누군가가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일을 직접 재현해 보았다'는 사진을 보는 것은 느낌이 다르다.

무엇보다 이 책을 서술하는 태도가 재밌었다. 읽기만 해도 입에서 한숨이 터져나오는 내용들이 난무하지만 드문드문 저자의 유머가 번뜩이기에 마지막 장까지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이를 테면,

(책 여백 부분의 '최고 & 최악의 사건' 설명 중)
1129 헨리 1세가 왕실 재무보고서인 그레이트롤을 시행했다. 파이프롤 담당 서기가 몇 세대 동안 지루한 일을 맡을 게 확실해 졌다.

(직업 거머리잡이 사진 설명 중) 토종 거머리 : 켄트 주의 람니마시는 얼마 남지 않은 토종 거머리의 서식지이다. 이 작은 생물은 자웅동체로 되어 있어서 항상 자기 자신의 매력에 빠져 있다.

서문에 쓰여있는 말대로 이보다 더한 직업도 많았을테고, 어디까지나 21세기의 저자가 주관적 기준으로 선택한 이야기들이므로 읽는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느낌은 다를테지만 일 때문에 피곤하고 짜증나서 죽처럼 늘어지고 싶은 저녁에 이 책을 몇 장 읽다보면 21세기에 태어났다는 사실, 부드러운 옷감과 수세식 화장실, 편하기 그지 없는 본인의 직업에 감사하게 될 걸;;;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렸다. 다른 건 다 제쳐두고라도 이 책에 흠뻑 몰입해 즐겼던 몇 시간만을 생각해도 별 다섯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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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홀 2006-05-21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재밌는 리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