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파랑 - 소울메이트를 찾아서, 제3회 No.1 마시멜로 픽션 대상작 마시멜로 픽션
차율이 지음, 샤토 그림 / 고릴라박스(비룡소) / 201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미지의 파랑

타임 슬립이란 무엇인가?
잠들지 못하는 자들이 시간을 잠재울 것이다. 시간을 뛰어넘어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일 ,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는 것일테니. 그 정도로 가야만 하고, 해야만 하고, 만나야만 할 사람이 여기엔 없고 저기에만 있다는 말이니까. 보통 사람에게 그런 간절함이 있는가? 어린이라면 어떨까? 예스라고 말한다면 이 장치는 동화이고, 노우라고 한다면 그것은 유희이고 공상이다. 동화는 어린이의 절박함에 동의하고 그를 위로하고자 한다. 판타지는 가상체험을 통해 잊게하고 떨쳐낸다. 동화가 옳고 유희와 공상은 그르다는 말이 아니다. 일종의 구별일 뿐이다. 동화는 아직 진정성에 줄이 닿아있고 유희와 공상은 연연함 없이 놀이한다. 작가와 독자 그리고 교육자에게 이런 기준이 작동할 것이다. 독서의 취향이기도 하고 평가의 관습이기도 하다. 취향은 개인적이고 관습은 전통적이므로 재고의 여지가 많지 않다. 유희적이고 공상적인 이야기보다 사실주의 동화에 대한 나의 개인적이고 관습적인 취향과 평가때문에 보물을 놓칠 뻔했다. 늦게 도착한 <미지의 파랑>을 만난 소회다.

시간여행은 성공할까?
판타지는 영화와 TV드라마에선 흔하다. 타임슬립 장치도 익숙하다. 멀게는 <백 튜더 퓨처>에서부터 가까이엔 <별에서 온 그대>, < 도깨비> 등. 그 결과에 따라 자칫 한풀이가 되거나 아무리 과거로 되돌아가서 발버둥쳐도 점점 엉클어져만 가는, 더욱 더 잘못 되어져만 가는, 절망의 확인이 될 수 있다. 물론, 현재와 긴밀히 연결된 과거에 도달하였을 때의 사정이다. 현재의 불만이 과거의 어떤 실수나 망설임, 오판 때문에, 그때의 잘못된 선택과 행위 탓을 할 때가 있다. 요즘 흔히 말하는 이불킥의 후회말이다. 이 때에도 단순하지는 않다. 안타까운 현재와 과거의 무엇을 원인결과 관계라고 결론짓고 그를 해결하고자 과거로 갈 수 있다고 치자. 기껏 찾아간 과거에서 그 원인자를 만났으나 그가 실제 원인이 아니라면? 이런 시간을 건넌 탐색과정이 알려주는 것은 새로운 원인의 단서일 뿐이다. 이런 식으로 모든 경우의 원인자들을 차례로 만났음에도 해결되지 않는 현재는 절망이고 비극이리라. 끝끝내 해피하지 않은 엔딩이 되면 잔인한가? 잔인하게 가르쳐주는 것은 그럴 가치가 있을 지도 모른다. 첫째, 여럿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원인은 한 가지가 아니라거나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것. 둘째, 그런 방황과 헤매임 자체가 인생이고 모두 그렇게 방황하며 살고 있다는 것. 셋째, 안 되는 줄 알았으면서도, 과거로 간다고 뭐가 달라지는 게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음에도 사람은 그에 매달린다는 것, 고집스레 참회와 번복과 원인규명에 집착한다는 것, 그런 사람이란 존재는 참 불가사의하다는 점.

목숨이 무슨 장신구야?
복잡한 인간 존재에 천착하는 이야기라면 아이들에겐 너무 어렵고, 풀어나가기도 힘겹고 그래서 어울리지 않으리라. <미지의 파랑>은 그런 어려운 데로 향하지는 않는다. 해피엔딩을 지향하고, 작가자신이 할 수 있고, 어린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기로 한다. 그러므로 솔직하다. 외로움의 이유를 친구에게 두고 그 친구가 영원한 우정을 약속한다면, 게다가 씩씩하고, 쉽지 않은 슬픔조차 잘 견뎌내면서 내게만 그 아픔을 털어내 준다면 그것은 영혼의 친구,이름도 멋진 소울메이트가 된다. 그런데, 단순히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를 넘어 목숨을 걸고 지켜주고, 배신의 안락함도 이겨내며, 어쩔 수 없는 운명까지도 극복해내야만 한다. 모두가 원한다, 세고 강한,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가기를. 그저 말 뿐인 맹세에 그치거나 만만한 사건으로는 용납되지 않는다. 실제론 불가능한 일이어야 하고 이야기 속에서는 가능하다. 기만이고 농락인가, 거짓이고 환상인가? 그럴싸한 아름다움으로 포장된 상업적 목적의 유혹인가? 생산자의 목적이 어떠하든 독자는 기대하고 감동 받을 준비를 한다. 충분히 속아주고 공감하고 응원한다. 속아 줄 사건과 공감할 감정은 응원할 이유이다. 목숨을 걸어도 좋다. 동화의 진지함과 환상의 유희성 모두 필요하다. 이른바 대중성이 판타지동화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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