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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 공주 - 제1회 교보문고 동화공모전 전래동화 최우수상 수상작 ㅣ 상상 고래 3
차율이 지음, 박병욱 그림 / 고래가숨쉬는도서관 / 2017년 10월
평점 :
#고학년 #생명 #여성 #여주인공
#★★★★★ #죽음 #귀신 #유교미신굴레
편견이 그득하여 쉬 손이 가지 않았다. 발견은 기뻤으나 너무 속이 보이는, 쉬워 보이는 제목이었다. '묘지'엔 귀신들이 수두룩할 테고,
거기에 '공주'란, 너무 성의없이, 고민없이 여자 주인공에게 붙여준 별명이잖은가! 게다가 대형 서점의 공모전이므로 너무 상업적으로 보였고,
말이 되지 않는 '전래동화 최우수상' 이라니 얕게 보일 수 밖에 없다. (구전된 이야기를 동화로 개작하는 전래동화는 창작동화와는 별개다.)
작가는 너무 어려보이는데다가 현대적 이미지(이름도 차율이, 본명이다)를 가졌으며, 출판사명(고래가 숨쉬는 도서관)도 낭만적인, 한마디로 너무
꾸며져 보였다. 처음 들어보는 작가와 평론가의 추천은 의심의 눈길만 짙어지게 한다. 나의 한계를 날카로운 사시로 만들었다. 너무 잘난 것에
대한 질시다. 나의 편향과 일종의 촌스러움은 곧 손을 들고 만다.
첫 장을 다 읽기까지에도 하루를 더 보냈다. 각 장의 머리를 장식하는 그림이 너무 만화적으로 단순하고 매끄러운 선으로 그려졌다. 순정
만화풍의 작위성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 취향에 걸린다. 더 흠을 보태면 인물의 얼굴이 없다. 겨우 입선만 살짝 올라가 자신만만하면서도 비웃는
듯하다. 티비 애니메이션 <이누야샤>를 흉내낸 배경의 인물도 남의 것을 벗어나지 못했네, 등등 불만이 늘어난다. 첫 줄은 또 어떠한가?
무덤 묘 (墓), 계집 희(姬). 묘희는 이름대로 무덤에 사는 계집아이다. (7쪽)
한자를 사용한 설명은 잘 들어오지 않고, 너무 짧은 것도 평소와 달리 불만이다. 기억나지 않는 시작 덕분에 다시 읽을 때에야 그 장점들이
제대로 눈에 띄었다. 간결하고 명쾌한 전개다. 그것은 마치 구미호의 변신 같기도 하고 백호의 날램 같아서 가볍고 속도감 있다.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은 독자의 습관이다. 맥없고 허투루 쓴 문장은 없다. 하나하나가 호랑이 발톱처럼 예리하고 그래서 따갑다. 긴장해야 한다.
대뜸 한 줄로 주인공 소개를 끝낸 뒤, 곧장 배경과 사건으로 들어간다. 때는 늦가을 한기가 스며드는 조선땅 한양 인근 천호골에, 구미호
구구의 변신장난으로 봇짐 장수의 짐을 턴다. 말은 짧고 공간도 시간도 빠르다.
봇짐장수들이 벌러덩 나자빠졌다. 낯빛은 흑색으로, 찡그린 주름마다 두려움이 서렸다. 역시, 묘희는 호랑이를 보고 당당한 사내를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호랑이라고 다 무서운 건 아닌데 말이다. 돌연 누군가 무어라 외쳤다.
" 이두두지 저두두지, 그만두지 호만두지!"
호랑이를 쫓는 주문이라나 뭐라나. 씨알도 안 먹힐 잡설이었다.(8쪽)
잡설에 의지하는 나약한 심사와 호랑이에 대한 편협한 상식 등 세태 묘사를 화살처럼 꽂았다. 주문이랍시고 외는 소리 좀 보라. 호랑이를
쫓겠다면서 두더지인지 멧돼지를 부르는데, 만두 주문인지 호빵주문인지 헛소리다.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는 그 말장난은 실로 그로테스크하다.
또한 나중에 알게 되는 복선도 쫙 한 줄 그어져 있는데, 기대하시라,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호랑이를 보고 당당한 사내'를 마침내 보게
된다. 게다가 두창(천연두) 전염병이 마마귀신의 짓이기보다는 물질적 오염임을 확신하면서 그 치료법을 연구하는 '청원' 선생과의 인연도 첫
머리에 깔린다. 또 있다. 어쩜 가장 궁금한, 묘희가 묘희가 된 까닭 말이다. 12년 전, 천마리 호랑이가 나온다는 골짜기에 핏덩이로 버려진
아기는 삼칠일을 무사히 살아서 귀신들을 보게 되었다는 것과 그렇게 묘희를 살리고 키운 것이 다름아닌 백호였다는 사연. 이처럼 촘촘하고 신속하게
서두에 쏘아놓은 화살과 던져놓은 그물로 작가가 잡는 것은 무엇일까? 미처 다 밝히지 않은 사연들이 그 실마리가 될 것이다. 누가 버렸으며 왜
버렸는가? 부모는 누구이고 무슨 연유가 있는 것일까?
이를 아는 사람이나 귀신을 만나면 자초지종을 들을 것인데, 그런 이는 반드시 묘희와 관계가 깊을 터, 산 사람이라면 버린 이와 같은
편이요, 귀신이라면 벌써 묘희 앞에 나타났어야 했다. 요즘 눈으로 보면 혼외나 혼전의 자식일 텐데, 그게 아니라면 다른 무엇이고 어떤 미신이 작용했을까, 생각해 보라. 치정은 어린이에게 어울리지 않으니
개인적 문제이기보다는 사회적 모순에서 찾았다. 남존여비, 삼강오륜의 유교와 이를 지탱하는 사농공상 계급사회가 그것이다. 홍길동전과 춘향전,
심청과 흥부놀부를 아는 이 땅의 아이들에겐 어쩌면 너무 흔한 이야기와 주제다. 귀신의 원한이나 저주라 해도 그 진원은 결국 사회문제다. 그러니
진부하지 않게, 지루하지 않게, 우연보다는 끈질긴 인연과 그 인연을 포기하지 않는 사랑의 힘이 필요하다. 보통의 사랑은 없다. 평범한 사랑으로는 납득하기 어렵다. 저승의 끄트머리에서 살던 아이가 새로이 이승의 한복판에서 삶을 꾸려가기에 충분하려면 그럴 수 없다. 옛 목숨과 새 목숨 사이에서,
이승과 저승을, 삶과 죽음을, 만남과 이별, 어쩔 수 없음과 어쩔 수 있음을 다 인정할 수 밖에 없어야 한다. 독자도 묘희와 함께 성장할 시간이 필요하겠다.
그렇게 힘겨운 선택과 경험을 들려준다고 동화는 허둥대거나 지치지 않는다. 후다닥 글자를 좇은 맘 급한 독자에게 이 동화는, 당장은 감탄하고
기특한 대상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