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으로 어두운 산과 어두운 동네가 보였다. 점점이 서 있는 가로등 불빛이 저 멀리까지 보였다. 나는 그 어느 곳도 아닌 곳에 와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어디로도 돌아갈 수 없을 듯한 기분이었다. 그 길은 어디와도 이어져 있지 않고, 이 여행에 끝은 없고, 아침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20쪽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시간은, 늘어났다 줄어든다. 늘어날 때에는 마치 고무처럼, 그 팔 안에 영원히 사람을 가두어둔다. 그리 쉽사리 풀어주지 않는다. 아까 있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아도 1초도 움직이지 않는 어둠 속에 사람을 내버려 두곤 한다.-26쪽
사람들은, 자기가 상대방에게 싫증이 났기 때문에, 혹은 자기 의지로, 또 혹은 상대방의 의지로 헤어졌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계절이 바뀌듯, 만남의 시기가 끝나는 것이다. 그저 그뿐이다. 그것은 인간의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뒤집어 말하면, 마지막이 오는 그날까지 재미있게 지내는 것도 가능하다.-51쪽
그렇다, 역시 가을이었다. 정신이 아득해지도록 단풍이, 빨강과 노랑의 눈부신 색채가 잘 보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폭풍처럼 나뭇잎들이 춤을 췄다. 우리 둘은 하염없이 노천탕에 몸을 담그고 있엇지만, 쓸쓸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가는 쓸쓸함. 길이 갈라지는 쓸쓸함.-52쪽
넌, 정말 운이 강해. 그래서 좀 남다른 인생을 보내게 될 거야. 많은 일이 있겠지. 하지만 자기를 질책하면 안돼. 하드보일드하게 사는 거야. 어떤 일이 있어도, 보란 듯이 뽐내면서-55쪽
나는 울지 못했다. 지금도, 제대로 울지 못하고 있다. 몇 번이나 후회했다. 지금도 하고 있다. 하지만 또 몇 번이나 생각을 바꾼다. 필경 우리는 그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마지막까지, 즐거웠다. 주문처럼, 그렇게 되뇌인다.-59쪽
11월은 어째 하늘이 높고 쓸쓸하네 그가 말했다. 당신은 어느 달을 좋아하는데? 11월 아, 그래. 왜? 하늘이 높고 쓸쓸하고, 허전한 느낌이 들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자기가 강해진 듯한 기분이 드니까. 하지만 공기에서 활기 같은 게 느껴지고, 겨울이 오기를 기다리는 상태라서 그렇기도 해요.-94쪽
슬픈 것은 죽음이 아니다, 이 분위기이다. 그, 충격이다. 충격은 머릿속에 남아 있고, 아직도 덩어리져 있다. 아무리 해도 녹아 없어지지 않았다. 가령 나 자신은, 나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다고 생각해도, 그 자신감은 언니의 모습이 떠오르는 순간, 단박에 사라졌다.
... 그래도 둘이서 걸으면, 무서울 것이 없었다. 감상이, 갇혀 있었던 어떤 영역에서, 잇달아 흘러나왔다. 죽음은 슬프지 않다. 감상에 짓눌려 숨이 갑갑해지는 것이 고통스럽다. 이 가을의 높은 하늘에서 도망치고 싶다. 그렇게 생각했다. -102쪽
시간이, 가버린다. 아니 실은 언제든 시간은 가버렸는데, 그것을 의식하는 일이 별로 없었을 뿐이다. 이제는, 그런 별 생각 없는 때로 돌아갈 수 없다. 사소한 일이 가습을 찌른다. 요즘 내 감수성의 세계는 마치 실연당했을 때 같다. -1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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