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두 사람은 평소보다 달게 잤는데, 저녁상에 오른 나물 덕이었다. 도화는 밤새 내장 안에서 녹색 숯이 오래 타는 기운을 느꼈다. 낮은 조도로 점멸하는 식물에너지가 어두운 몸속을 푸르스름하게 밝히는 동안 영혼도 그쪽으로 팔을 뻗어 불을 쬐는 기분이었다. 잠결에 자세를 바꾸다 도화는 속이 편하다는 느낌을 몇 번 받았다.
_86쪽, ‘건너편‘

여러모로 올겨울은 겨울 같지 않았다. 파이프에서 물이 새듯 미래에서 봄이 새고 있었다. (87쪽)

도화가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며 눈가 주름에 파운데이션이 끼지 않았는지 살폈다. 그러곤 자신이 한창때를 지났다는 걸 체감했다. 아무렴 한창때가 지났으니 나물맛도 알고 물맛도 아는 거겠지. 살면서 물 맛있는 줄 알게 될지 어찌 알았던가. 직장 상사들은 ‘삼십대 중반이야말로 체력과 경력, 경제력이 조화를 이루는, 인생에서 가장 좋은 때‘란 말을 자주 했지만 도화는 알고 있었다. 자신도, 이수도 바야흐로 ‘풀 먹으면‘ 속 편하고, ‘나이 먹으며‘ 털 빠지는 시기를 맞았다는 걸.
(87쪽)

오래전, 이수가 현관을 나설 때면 ‘저 사람 저대로 사라져버리면 어쩌지. 길 가다 교통사고라도 당하면 어떡하지‘ 가슴이 저렸던 기억이 났다.
-이수야.
-응.
-나는 네가 돈이 없어서, 공무원이 못 돼서, 전세금을 빼가서 너랑 헤어지려는 게 아니야.
-••••••
-그냥 내 안에 있던 어떤 게 사라졌어. 그리고 그걸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거 같아.
(11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연 소년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안간힘을 다해 새로운 삶을 향해 달린다. 미래에 우리를 기다리는 건 무엇일까? 인위적인 혼수상태에 빠져 그 숱한 세월을 보낸 후의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네 소년들은 머나먼 어딘가에서 무엇을 위한 것인지도 모른 채 죽어가고 있는데•••••• (2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손바닥에 고인 땀을 보니 문득 에반을 처음 만난 날이 떠올랐다. 손바닥 위 반짝이던 얼음과 부드럽고 차가운 듯 뜨뜻미지근하며 간질거리던 무엇인가가. 그렇지만 이제 다시는 만질 수 없는 무언가가 가슴을 옥죄었다. 하지만 당장 그것의 이름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몰라 찬성은 어둠 속 갓길을 마냥 걸었다.
_81쪽, ‘노찬성과 에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하는, 너무도 사랑하는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과거에 어떤 사람은 무슨 중요한 일을 그리 열심히 하는지 일주일에 ‘월화수목금금금•••‘을 일한다고 말하기도 했지. 그 사람 생김새나 언변은 나쁘지 않았는데 금붕어도 아니면서 ‘금금금‘이라고 물을 뻐끔대는 듯한 발음을 자꾸 듣고 있노라니 그 사람의 성과마저 신뢰할 수가 없어졌어. 지금도 입만 열면 ‘바빠 죽겠다, 쉴 틈이 없다‘고 자랑하는 인간은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이지 않아.
_성석제, ‘쉬어야만 하는 이유‘, 소설집 <사랑하는, 너무도 사랑하는>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드라운 뺨과 맑은 침을 가진 찬성과 달리 할머니는 늙는 게 뭔지 알고 있었다. 늙는다는 건 육체가 점점 액체화되는 걸 뜻했다. 탄력을 잃고 물컹해진 몸 밖으로 땀과 고름, 침과 눈물, 피기 연신 새어나오는 걸 의미했다.
_51쪽, ‘노찬성과 에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