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 고양이 8세부터 88세까지 읽는 동화
루이스 세뿔베다 지음 / 바다출판사 / 200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요즘은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있다. 도서관이나 서점에 가면 가슴이 먹먹하다. 이렇게 읽어야 할 책이 천지인데 나는 왜 그렇게 책도 안 읽고 우울과 절망의 늪에만 빠져 있었나.
정말로 어떤 책은 단지 읽는 것만으로도 우울과 절망의 늪에서 한 인간을 구해내는 힘을 가진 것이 있다. 이 <갈매기에 나는 법을 가르쳐준 고양이>라는 이상한 제목의 소설도 그렇다.
이 책에는 소르바스라는 멋진 고양이가 나온다. 이 소르바스가 있는 세계 속의 고양이들은 말을 할 줄 알고 인간의 모든 것을 이해하지만, 이것이 밝혀질 경우 인간들이 고양이를 실험실에서 조져버릴까봐 침묵하고 있다. 다만 인간이 고양이에게 맛있는 비스킷을 주거나 이쁜 짓을 하면 "음, 훌륭한 꼬마인걸!"하고 혼자 생각할 뿐이다.
이 고양이들의 세계에서는 또 하나 특이한 점이 있다. 이 고양이들이 있는 항구에서는 항구 고양이 한 마리의 문제가 곧 항구 고양이 전체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너무 많은 책장들을 넘긴 탓에 '발톱이 다 닳아 없어져서 남은 발톱만이 짧게 드러난' 박사 고양이도, '이런 향유고래 기름 같은 경우가 있나!' 같은 멋진 비유를 쓸 줄 아는 모험가 고양이도 모두 소르바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모은다.

소르바스는 어느 어미 갈매기의 유언에 따라 아기 갈매기에 나는 법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나는 법을 가르친다 라는 것이 좀 뻔한 레퍼토리 같기도 하지만 세풀베다는 확실히 풍부한 이야기를 풀어낼 줄 아는 작가이다. 아기 갈매기를 인간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화분 속에 갈매기를 숨겨두는 장면이라든지, 아기 갈매기를 잡아먹으려는 쥐군단과 하수구에서 담판을 짓는 장면 등은 정말이지 가만 있을 수 없도록 재미있는 장면들이다.
그린피스 회원답게 이 작품에서도 인간의 환경파괴에 대해서 냉엄하게 꾸짖는 내용이 나오지만, 그 환경파괴의 실상을 지적하는 데 있어서도 세풀베다는 절대로 교훈적이거나 운동가적인 말투로 사람들에게 교훈을 전달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아이같은 말투로 어느 멋진 고양이의 세계와 기름에 떡이 져서 죽어간 어느 어미 갈매기에 대해 천연덕스럽게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전에 나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보면서 상상 속의 재미있는 캐릭터들을 맘껏 만들어낼 수 있는 애니메이션의 세계에 감탄한 적이 있는데 글 속에서도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 아님을 세풀베다는 보여주고 있다. 박물관 매표소를 지키며 맥주를 마시거나 나이많은 뱃사람들과 체스를 즐기는 침팬지 마띠아스 같은 캐릭터는 오히려 어느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보다도 더 나를 즐겁게 했다. 게다가 마띠아스가 박물관 표를 끊어주고서는 늘 거스름돈을 삥땅치려하는 모습에서는 당장 이 항구로 달려가서 이 웃긴 침팬지를 꼭 껴안아주고 싶었다.

이 작품에서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무 조건없이 그저 다른 존재를 사랑하는 법에 관한 것이다. 서로 다른 존재끼리 약속을 지키고 다른 것을 파괴하지 않을 것에 대한 이야기. 적어도 그것만 지켜진다고 해도 전세계에서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많은 끔찍한 일들에 대한 대안이 어느 정도 제시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아기 갈매기가 자신이 날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주변에서 보아왔던 갈매기와 자신이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소르바스가 하는 이야기는 꽤 마음에 들었다.

< "아기 갈매기야, 우리는 여지껏 우리와 같은 존재들만 받아들이며 사랑했단다. 우리가 아닌 다른 존재를 사랑하고 인정하진 못했어. 쉽지 않은 일이었거든.
하지만 이젠 다른 존재를 존중하며 아낄 수 있게 되었단다. 네가 그걸 깨닫게 했어. 너는 갈매기야. 고양이가 아니야. 그러니 너는 갈매기의 운명을 따라야 해.
네가 하늘을 날게 될 때, 비로소 너는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네가 우리에게 가지는 감정과 너에 대한 우리의 애정이 더욱 깊고 아름다워질 거란다. 그것이 서로 다른 존재들끼리의 진정한 애정이지.">

세풀베다는 이 작품에서 결말도 아주 멋지게 냈다. 마침내 소르바스와 온갖 독특한 항구의 고양이들, 그리고 이 항구의 어느 시인이 힘을 합친 결과 아기 갈매기는 비행에 성공하고 소르바스와 시인은 이런 대화를 나눈다.

<시인은 고양이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됐어, 우린 드디어 해낸 거야!"
"그래요, 아기 갈매기는 이제야 중요한 사실을 깨달은 거예요."
"오직 날려고 노력하는 자만이 날 수 있다는 사실이죠."
"그러고보니 지금은 내가 오히려 방해가 될 것 같구나. 아래서 기다리지."
시인은 소르바스를 혼자 남겨두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고양이 소르바스는 그곳에서 밤하늘을 세차게 가르며 날고 있는 아기 갈매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가에는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액체 방울들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몸집이 큰 검은 고양이의 노란 눈에서. 고결하고 숭고한 마음씨를 지닌 고양이의 눈에서.>

요즈음 내가 본 많은 영화나 소설들에서 숱한 사람들이 흘린 눈물 가운데서도 이 고양이 소르바스의 눈물은 그야말로 최고였다.

당분간 세풀베다의 작품을 좀 탐독하려고 한다. 세풀베다는 내가 되고 싶어하는 스타일의 작가다. 그는 풍부한 이야기를 갖고 있으며 멋진 캐릭터를 만들어낼 줄 안다.
예전에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을 보았을 때도 한국 소설만 읽어대던 나에게는 상당히 충격이었는데,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 고양이>는 그에 대한 나의 독자로서의 신뢰를 더 깊게 해 주었다.
얼른 번역되어 있는 세풀베다의 작품, 다 읽어보아야지.

(+)참! 세풀베다도 세풀베다지만, 이 책의 그림을 그린 사람도 나는 보통이 아닌 것 같다. 표지에서도 뽀송뽀송한 소르바스의 검은 털이 그대로 느껴지지만, 책 내용 중간중간에 있는 삽화에서 나는 가끔씩 그림을 보고 깜짝 놀라곤 했다. 이 삽화를 그린 사람은 분명 세풀베다의 이 작품을 꼼꼼이 읽고, 많이 고민했음에 틀림없다. 이 삽화가의 그림은 이 책을 더 재미있게 만드는 데 분명히 한몫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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