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있기 좋은 날 - 제136회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
아오야마 나나에 지음, 정유리 옮김 / 이레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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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왠지 속내를 들킨 듯한 기묘한 멋쩍음

치즈 짱은 프리타이다.
프리타, 라는 건 강인한 인종일 거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조직에 매달려 사회에서 밀려날까 두려워하며 정식코스를 밟는 수많은 나 같은 유약한 인간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인한 신인류. 자신의 생존을 위한 행보를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하지만 치즈 짱은 그다지 강해 보이지 않는다.
내가 동경하는 프리타인 치즈 짱의 고민도, 하루하루를 전전긍긍하는 나와 별다르지 않다.

될 수 있으면 이대로 젊고 세파에 시달리지 않은 채 조용히 살아가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겠지. … 될 수 있는 한 피부를 두껍게 해서 무슨 일에도 견뎌낼 수 있는 그런 인간이 되고 싶다.
-본문 중에서

억센 손톱으로 원하는 건 무엇이든 움켜쥘 수 있는 강인한 신인류가 되고 싶었던 20대 초반의 세상에는 두려운 것이 너무 많았다. 그때 나의 소망은 치즈 짱과 같았다. 가능한 한 세상 안에 빠져들지 않고, 어떤 것에도 진심이 되지 않고, 그래서 상처입지 않고 싶었다. 작고 두꺼운 껍질 안에 덩치만 커다랗고 속내는 물렁한 나를 우겨넣고서 껍질 밖의 세상으로부터 연약한 나를 지키고자 고군분투했다. 강렬한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언제나 담담하고 조용하게, 그렇게 살면 기쁨은 포기해야 할지라도 적어도 아픔은 맛보지 않으리라.


"세상은 안도 없고 밖도 없어. 이 세상은 하나밖에 없어."

칠순의 깅코 씨는 미묘하다. 처음 본 사람은 노망을 의심할 만큼 확실히 미묘한 할머니이다. 당연히 젊은 사람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고 체념해야 하는 늙은이가 왜인지 당연한 모든 것들을 은근슬쩍 무시한다. 무시하고서 겸연쩍어 하는 모습도 없다. 탱탱한 피부도 아니면서 치즈 짱의 고급 화장품을 훔쳐 쓰고, 칠순의 늙은이면서 남자친구와 함께 댄스를 추러 다니고, 자신만만한 젊은이들의 잔치인 발렌타인데이에 곱게 차려입고 초콜릿을 사러 간다. 지금껏 키우던 고양이들의 개별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체로키라는 이름 하나로 모든 고양이를 추억한다.
모든 것이 불안정한 치즈 짱이 보기엔 차라리 불안한 20대 초반의 어중간한 자신보단 노년의 삶이 더 즐거운 것 같다. 어서 빨리 나이가 들어 늙어버렸으면. 치즈 짱이 생각하기에 자신이 이렇게 불안한 것은 아직 자신은 세상에 속하지 못하고 밖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인 것 같다. 차라리 노년이 되면 어서 빨리 세상 안에 들어가야 한다는 조바심도 사라지고, 다른 사람들은 제자리를 찾아가는데 나만 허공에 떠 있다는 열등감도 사라질 것 같다.
나 역시 치즈 짱과 같은 생각으로 어서 빨리 서른 살이 오기를 열망했다. 서른 살만 되면 어디에서 딱 들어맞지 않고 둥둥 부유하는 이 어중간함이 사라지고 내 인생과 나 자신에 대해 자신이 생길 것 같았다. 저렇게 분주하게 다니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나 역시 세상 안에 확실히 속해져서 죄책감이나 멋쩍음 없이 확실한 소속감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서른이 된 후에는 난 여전히 세상과 나 사이의 거리를 느끼고, 내가 지금 세상 안에 들어온 걸까 아니면 아직도 밖에 있는 걸까 고민한다.
그런 고민을 할 때면 답답한 마음에 혀를 차다가도 문득, 세상을 향해 날 숨기느라 방어하면서 지나버린, 감정의 요동치는 기쁨을 포기하고 대신 무덤덤한 안전을 선택해버린, 그래서 조금도 치열하게 고민하지 못하고 지나버린 사춘기를 지금 겪나보다 싶어 웃음도 난다. 아마도 난 사춘기다. 하지만 예전의 20대보단 조금 강해진 사춘기다.
이제 뭔가를 조금 알 것 같기는 하다.
세상의 안과 밖은 상관없다. 내가 있는 바로 이 자리가 바로 나의 세상이다. 이런 세상이 전 세계의 인류 수만큼 모여서 세상이 되었다. 난 지금 세상에 있다.

"제가 없어지면, 제 사진도 걸 건가요?"
"치즈 짱은 고양이가 아니잖아."
"걸어주세요."
"아직 안 죽었으니까 안 돼."
"하지만, 벽에 안 걸어놓으면 잊어버릴 거잖아요."
"추억은, 거기에 없어."

모든 고양이가 체로키가 되어도, 지금 나는 존재하고, 언젠간 존재했었던 존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꼭 존재하는 것이 내 존재의 의미의 전부는 아니니까.
추억은, 진짜 소중한 것은 존재에 있지 않다.


"끝나고 나서 차나 한잔 할래요?"
"네, 할래요."

나만큼이나 물러터진 치즈 짱이었지만, 한편으로 오오, 이 여자 제법 강단 있는데, 하며 은근히 감탄한 면도 있다. 후지타의 교제의 시작을 알리는 제의에 선뜻 네, 할래요, 라고 대답한 것처럼 치즈 짱은 세상에 대해 위축되어 있어도 결국은 다시 시작하곤 했다.
지금껏 나에게 난 당연히 연약한 존재였다. 미숙아, 불량품, 함량미달. 그래서 그런 내가 세상을 향해 손을 뻗는 건 반칙이다. 하지만 이제 세상은 정정당당히만은 살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생존을 위해선 반칙도 불사해야 한다. 그래서 난 세상을 향해 눈을 뜬다. 손을 내민다.
치즈 짱만큼 한 발짝씩 세상을 향해 생존하고 있는 나를 보여줄 수 있기를.
언젠간 끝이 날지라도 몇 번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기를.
그래서 몇 번이든 몇 번이든 다시 말할 수 있기를.
"네, 할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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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 1
김별아 지음 / 문이당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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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으면서 애달팠던 구절 하나, 감상 하나 ** 
자장자장, 자장자장....... 눈이 큰 우리 아가 잃어버린 것들 잘 찾겠다, 귀가 큰 우리 아가 속삭임도 잘 듣겠다, 코가 높아 냄새를 잘 맡고 입이 커서 상추쌈도 잘 먹겠다, 손이 크니 주는 것도 잘 받겠고 발이 크니 넘어지지 않고 잘 걷겠다....... 있는 그대로 귀하고 어여쁘고 맞춤하다 - 본문 중에서
어머니의 사랑은 너그럽다.
눈이 크면 큰대로 팔자 드센 게 아니라 잘 보이니 좋은 것이고,
귀가 크면 남의 속삭임이나 듣고 다녀 음흉한 게 아니라 작은 소리도 잘 들리니 좋고,
코가 높으면 상스러운 것이 아니라 냄새 잘 맡으니 기특하고
입이 크면 상놈에, 손발이 크면 도둑놈이라 하여도
주는 대로 잘 먹고 잘 받으니 착한 데다, 넘어지지 않고 잘 걸을 발이라 흐뭇하다.
그러니 참, 어머니의 사랑은 어리석다.
**

논개를 읽으면서 가장 끔찍했던 건
우리나라를 침범한 왜적이 아니었다.
같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너와 나의 구별이 너무나 뚜렷하여 한 나라라는 것마저 망각해버린
내 민족, 내 동포의 모습, 그것은 참혹 그 자체였다.
그토록 삼강이 어떻고 오륜이 어떻고 충과 의가 또 어떻고를 입에 달고 외던 사람들이
전쟁이 나자마자,
백성과 노비들의 피고름을 쥐어짜 모은 재산을 움켜쥐고 꽁지가 빠져라 도망간 사이,
꽉꽉 비틀리고 탈탈 쥐어짜진 백성들은,
비치적비치적 일어나 내 가족과 내 나라의 강토를 지키기 위해
뼈만 앙상한 손아귀에 변변찮은 무기를 그러쥔다.
지금까지 그러했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러할 것처럼.

전쟁이 났을 때 여자들은 참 비참하다.
죽는 편이 날까? 하지만 그러면 아이들은? 늙은 어머니와 힘없는 아버지는 어떡하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고 싶다는 생각은 차라리 사치다.
하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먹어야 산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고,
전쟁이 참혹할수록 여자의, 어미의 손을 필요한 곳은 차고도 넘친다.
그래서 여자는 더 강해진다.
땅을 일구던 따뜻하고 다정한 흙손 그대로 칼과 창을 잡고 생사의 갈림길로 내몰린 불쌍한 남자들과
토실토실한 엉덩이로 골목길을 질주하고 고운 꽃을 따 먹으며 자라나야 할 나이에
굶주림과 공포에 지쳐 눈만 커다래진 불쌍한 내 아이들을 위해
여자는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이든 하고 할 수 없는 일까지 기꺼이 한다.
생명을 키우고 돌보는 건 원래부터 하던 일이 아니던가. 

처음에 논개를 읽기 시작한 이유는 순전히 표지 때문이었다.
논개라고 하면 교과서나 위인전에서 왜장을 안고 물에 뛰어든 기생이라 나와 있었고,
그보다 더한 무엇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굳이 그런 구닥다리를 소설로 찾아 읽고 싶은 마음은 더구나 없었다.
그런데 마치 보자기처럼 곱게 보이는 표지가 참 갖고 싶었다.
그렇게 논개를 읽으면서 문득 깨달은 것은,
난 논개를 많이 들은 것에 비해서 거의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구태여 공부하려고 읽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소설이니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일지는 모르겠다.
다만, 논개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몰락한 양반이던지 기생이던지 최경회의 후실이던지는 다 상관없었다.
그녀는 잔다르크처럼 하늘의 계시를 받아 우국충정의 애국심이 마구 솟구치는 위대한 사람도 아니고, 한점의 흐트러짐 없이 외곬의 길을 가는 날 때부터 남다른 인물도 아니었다.
왠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그저 보고 싶은 걸 보려고 잠깐 허튼 짓을 하기도 하고,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아서 마음 앓이도 하는 보통 사람이었고,
사랑과 함께 죽어야겠다 마음먹고 그것을 실행할 만큼, 딱 그만큼만 용기 있는 여자였다.

사실 그녀가 애국을 위해 죽지 않아서 좋다. 그녀가 위대한 사상과 이념을 위해 몸을 던진 것이 아니라서 더 좋았다.
후세의 사람들이 어떤 의미를 부여하든 간에, 역사적인 사실이야 어떠하든 간에,
이제부터 내 안에 그녀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은 대로
그래서 죽음을 향해 뛰어든, 보통 사람이 되었다.
난 그녀가 이제는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아마도 이미 행복해졌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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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거슨 리더십
심재희.한화철 지음 / 메가트렌드(문이당)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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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과거에 축구를 말할 때는 축구장은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말을 많이 하곤 했다.
여자 입장에서 볼 때, 축구는 22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조그마한 공 하나를 쫓아 우르르 몰려다니며 골대에 그거 하나 넣어보겠다고 기를 쓰는 우스운 경기라는 생각도 종종 든다. 하지만 그렇게 치면 이 세상에 우습지 않은 스포츠가 어디 있으랴.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일견 그렇게 우스워 보이는 행위가 전 세계의 사람들을 미칠 듯한 흥분을 넘어선 광분의 상태로 몰아넣는 데 기가 막히게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효과뿐이랴. 경기의 승패를 떠나서 훌륭한 게임을 보고 난 순간에는 가슴 뭉클한 감동과 무한한 존경심마저 든다. 필드 위를 뛰어다닌 땀범벅의 선수들과 그 선수들을 이끈 감독 및 스태프진에 대해 진심어린 경의를 바치는 것에 조금의 주저도 없게 되는 것이다. 이 강렬한 효과로 말미암아 과거 독재 시대에는 군중을 꾀는 몹시 효과적인 수단으로도 사용된 전적이 있는 찝찝한 과거의 축구며 야구며 농구 들이 아니던가.

하지만 이제, 축구를 단순히 대중 선동과 흥미를 위한 게임으로 보는 시대는 지난 것 같다. 2002년 월드컵을 기점으로 엔간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축구의 잠정적인 서포터즈화 되어버린 상태에서, 우리의 눈을 시원하게 해 준 것이 있으니, 바로 축구의 종가라는 잉글랜드의 축구다. 프리미어리그라던지, 챔피언스리그라던지, 몇 년 전에는 머릿속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단어가 일상에 친숙하게 자리 잡은 것도 그 무렵부터이다. 그 와중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오래된 할아범이라는 퍼거슨 감독이 우리의 훈남, 박지성을 간택하였고, 그저 우리 지성 오빠(미안, 오빠라고 딱 한번이라도 불러보고 싶더라 ㅡ,.ㅡ)가 종가에서 뛰게 되었다는 생각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이른바 맨유에 은근한 호감을 보이게 된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라고, 보다 보니 보이는 것이 맨유의 완소남, 훈남, 고마운 꽃미남 선수들. 거 외국물이 좋긴 좋은가보라고 영화 「300」을 보면서 느낀 생각을 맨유를 보며 다시금 복습하게 만들어주신 정녕 고마운 분들이셨다. 경기가 끝난 후 훌렁훌렁 벗어던지시는 푸른 초장의 긍정적인 육체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이미 통제를 벗어난 내 입이 중얼거리는 대사는 ‘니들도 저녁은 지옥에서 먹을 거냐?’ 홀로 득도하여 빠져버린 무아지경의 황홀은 달콤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현실은 꿈만 먹으며 살기엔 배가 고프다.

이 책의 한 구절에서 ‘건축물 자체는 콘크리트 덩어리에 불과하지만 그것에 이야기가 붙으면 역사가 되고 상징이 된다’는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동일한 이야기를 하겠다.
‘축구 자체는 스포츠에 불과하지만 그것에 이야기가 붙으면 역사가 되고 상징이 된다.’
맨유는 그저 그런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하나의 팀이었지만, 1958년 비극의 역사와 1999년 불굴의 감동의 역사를 위에 입으며 드디어 신화로 등극했다.
그들은 팀의 절반이 사고로 죽어버리는 비극을 딛고 일어났으며, 축구사에 유례없는 트레블 달성의 신화를 창조했다. 이것이 감동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맨유의 축구 스타일에 있다. 맨유는 가진 자의 방어 축구가 아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고 버티는 동물 같은 근성의 폭발하는 축구다. 그리고 그 뒤에 이런 스타일을 결정짓는 날카로운 승부사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있다.

퍼거슨 할애비를 소개하기 위한 서론이 너무 길었다. 축구에 문외한인 여자 나부랭이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선 자신부터 설득할 것! (그러나 딱히 설득할 건 없다! 핫핫! ㅡ,.ㅡ) 장황한 서설의 요지는 맴모스급 무시무시한 대형 팀을 무려 20여 년 동안이나 좌지우지하며 떡 주무르듯 주물러 온 이 늙은 감독은 도대체 무슨 재주가 있어 이런 엄청난 일을 서슴없이 저질렀을꼬 하는 궁금증이다. 거대한 팀의 거대한 스타들을 말 한 마디로 복종시키고, 눈치 보며 설설 기게 만드는 신통한 재주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뿐인가? 훌리건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신 분들은 모두 알다시피 그들이 자행하는 막강하고도 생산성이란 전혀 없는 그 파괴력에, 어이가 상실되고 눈가에 쓰나미가 차지 않던가. 그런 폭도 1분 5초전 같은 무리가 65세 넘은 그 할애비 감독의 말 한마디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철썩 같이 믿겠다는 어린양의 유일신앙을 고백하며, 두 손 모아 완두콩 즈려 잡고 메주가 쑤어지기를 기다린다. 이쯤 되면 우리는 나지막이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오빠, 멋져요.”

다윗이 골리앗의 대결이, 신빙성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이 이야기가 왜 그토록 오랜 시간 회자되고 회자될 정도로 인기를 끈 줄 아는가? 솔직히 갑옷으로 무장한 그렇게 커다란 장사를 돌멩이 하나로 때려죽이는 것이 가당키나 한 말인가? 요즘은 어린 아이도 그런 말은 믿지 않는다. 종교의 힘이라고?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좀 더 대중적인 마인드로 보면 이 스토리는 거대한 강자에 대해 당당하게 맞서 싸우고, 싸워 이기는 약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다윗이 이길 때 우리는 마치 우리가 우리를 짓누르는 무자비한 현실의 강자와 당당히 맞서 싸워 이긴 듯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맨유는 현실의 대리자 다윗이다. 시즌의 시작은 말도 많고 탈도 많고 불협화음도 끊이지 않게 들려오며 시작하지만, 일단 시즌이 시작되면 맨유는 오로지 팀을 위해 자신을 버리고, 승리를 향해 맹렬하게 돌진한다. 현란한 기교의 승부가 아니라 골대를 향해 지칠 줄 모르고 달려드는 열정의 경기를 펼친다. 그렇다고 맨유 선수들의 기교가 떨어진다는 말은 아니다. 당연히 그들은 최고다. 여기에 토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단지 승리를 향한 투지가 기술을 우선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의 거침없는 기백에 그토록 미친 듯이 열광하는 것이다.

우스개 소리로, 어떤 사람이 골리앗에게 가는 다윗에게 이렇게 물어봤단다. “너 무섭지 않니? 저렇게 큰데.”
다윗은 가만히 골리앗을 바라보며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흠, 저렇게 크니 일단 빗맞을 일은 없겠네.”

하지만 인생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인생의 골리앗은 돌팔매 하나로 쓰러지지도 않는다. (과연 트럭으로 돌덩이를 들이부어도 쓰러질지 의문이다.) 하지만 내가 할 일은 여전히 하나다. 저 커다란, 그래서 적어도 빗맞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을 골리앗을 향해 던지고 또 던지는 것이다. 이렇게 던지다 보면 언젠가는 쓰러질 수도, 평생 가도 쓰러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안심하고 던져도 되는 것만 해도 어딘가 하고 스스로를 위로한다면 내가 너무 소심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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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 1
송은일 지음 / 문이당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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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반야, 제목만 보고 불교색이 있는 소설인가 싶다가, 무녀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기에 그만 호기심이 동했다. 무속이나 무녀, 무당 등에 대해 평소에도 은근히 관심 있었기도 했고....

하지만 무려 2권이나 되는 걸 선택하려니 조금 망설여지기도 했다.

이거 읽다가 재미없으면 어떻하지? 저번에 다빈치 코드는 1권까지 재미있다가 2권부터는 김이 빠지던데..그 꼴 나는 거 아니야? 안 그래도 요즘엔 긴 걸 잡기가 조금 망설여지기도 하던 참이었다. 요즘 오쿠다 히데오라던지 해서 단편 몇 개가 있는 단행본들을 읽기가 편해진 참이었으니까.


그래도 무속이라는 건 왠지 꽤 스릴있고, 조심스럽고, 터부라는 느낌이 강한 분야다. 적어도 나한테는. 게다가 내 평소 지론에 의하면 터부란, 터부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범하기에 충분할 만큼 매력적인 법이니까.

그래서 그만, 읽을 이유가 생겼다.

이거 한 무녀의 일대기에 대한 이야기일까? 에피소드 중심이면 좋겠는데... 다큐 성향의 글이려나?


아무 생각없이 첫장을 펼쳤다.

어? 역사소설인가? 워낙 픽션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나로써는 반가운 일.


슬금슬금 읽어가는 도중, 어이가 없어졌다. 아니, 뭐 이런 무녀가 다 있어?

무녀란 게 자신이 받은 신기로 사람들의 곤란함을 풀어주고, 문제를 해결해주고, 굿해주고 그래서 원한도 달래주고 그래야 되는 거 아니야?

그런데 반야라는 무녀, 지멋대로다.

돈도 더럽게 많이 받고, 위로는 코딱지만큼도 없이 사람 가슴에 비수나 팍팍 날린다.


그런데 좀더 지나다보니, 문득 참 내가 도둑심보인가 싶은 생각도 조금 들었다.

자기도 신기를 받고 싶어 받았을까? 개인적인 삶을 희생하고 그딴 신기, 받은 것도 억울한데 왜 남의 더러운 속사정까지 헤아리며 그 뒷치닥거리를 하는 걸 당연한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잘해도 본전치기요, 못하면 멍석말이 운명이다.


게다가 잘 보이지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양반은 물론이고, 양민들까지, 무녀란 건 길거리에 세워놓고 때려죽여도 아무 거릴낄 게 없는 천것 중에서도 천것인 것이다.

무녀라는 거 참 더럽고 못할 짓이다 싶었다.

그러고 보니 이 여자 심사가 이리 뒤틀려도 그렇겠다 싶어 이해가 가더라.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두 눈 멀거니 뜨고 놓쳐야 하는 게 당연하고, 순리가 아닌 일도 가타부타 말할 수 없는, 살았지만 살지 않는 인생, 무녀. 권력자 밑에서 살자니 몸은 지켜 무얼 하겠나. 길든 짧든 한 생 살기에 마땅할 만큼 타고나는 몸뚱이. 탄식이 절로 나온다.


그래도 억울하다.

체념하고 순응하고 살자니, 벨이 꼴린다.

똑같이 눈 두 개, 코 하나 달고 나왔는데, 뭐가 그리 잘나셨을까.

그리 잘나신 분들이면 못난 것들 돌아볼 여유도 있을만한데, 그런 아량도 없는 인간, 잘난 건 또 무얼까?

아무래도 그런 내 속맘을 이 여자도 가지고 있었나 보다.

그래서 고분고분 점이나 보며 살 수 없었나 보다.


이 소설은 강인한 여자들에 대해 말한다.

역사소설이네, 시대에 대한 의식적 참여네, 읽는 포인트는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그렇다. 이 소설은 '여자들'에 대해, 그리고 '여자들의 삶'에 대해 말한다.

이 책의 여자들은 멋지다. 인생이 흘러갈 때 이미 모든 것이 정해졌다면 정해진 대로 흘러가라. 난 내 인생을 산다라고 말한다. 멋지지 않은가!


어차피 될 대로 될 터라면

잘되던 못된던 난 나의 소신대로 행동하고 이 순간을 견디리라.

모든 일은 될 대로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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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가족
권태현 지음 / 문이당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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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마라톤을 시작하다.

 

42.195km. 

지금 어디까지 온 것일까? 앞으로 얼마나 더 달려야 할까? 포기할 수는 없는 걸까? 과연 무엇을 위해 달리고 있는 걸까?

 

「인생은 경기장과 같아서 태어난 순간부터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경기를 시작한다. 방법을 가르쳐주는 법도 없고 연습도 없다. 이 얼마나 불합리한 일인가. 이것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언제든지 주저하지 않고 경기장에서 퇴장해도 좋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말이다. 그는 서른여섯의 이른 나이로 스스로 경기장에서 퇴장해버렸다. 사람들은 인생을 흔히 마라톤에 비유한다. 시작은 누군들 힘차지 않을까. 달리다보면 스스로의 스피드에 황홀할 때도 있을 것이다. 피곤치 않은 등과 다리가 자랑스럽기도 할 것이다. 길가에 주저앉은 초라한 노년의 선수들이 얼마나 한심해보이던지. 어서 빨리 완주를 하고 결승점에 들어가 승리의 환호성에 흠뻑 취해 트랙을 돌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그런데 달리다 보면 어느 샌가 나를 앞질러 달려 나가는 젊디젊은 선수들을 마주치게 된다. 피곤을 모르던 내 등과 다리가 어느 순간부터는 고통을 호소한다. 등뼈가 부서지고 다리의 근육이 뒤틀려 포기하고 싶어지는 그 순간이 찾아온다. 지금껏 묵묵히 버텨준 너덜너덜한 심장과 폐는 가슴이 터질 듯이 발길질을 해대며 당장 그만두라고 아우성을 친다. 그때가 되서야 주저앉아 쉬고 있을지언정 아직 트랙을 내려서지 않은 노년의 선수들의 위대함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시대의 아버지들,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마라톤을 시작하다.


민시우는 대기업에서 명예퇴직 당하고 자신의 사업을 시작하지만 곧 부도를 당해 사업체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자신은 빚더미에 올라앉게 된다. 부도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가족이 함께 몸담을 집 한 칸도 챙기지 못한 그는 결국 가족들을 뿔뿔이 친척집으로 보내고 자신은 노숙하는 처지가 된다.

흩어진 가족은 참 연약하다. 전업주부였던 아내 지은은 학습지를 돌리며 조금이라도 생활비를 벌어보려고 하지만 처한 상황은 버겁기만 하다. 고등학생인 큰 아들은 싸움질에, 삐끼 알바에, 오토바이 폭주족까지 차근차근 양아치의 길을 향해 돌진하는 중이고, 중학생인 둘째딸은 백화점에서 물건을 슬쩍하다 걸려 전화가 오곤 한다. 유약하기 짝이 없는 초등학생 막내아들은 완전히 의기소침해져 있다. 몰아치는 빚쟁이들의 독촉전화와 자고 일어나면 온 몸이 뻣뻣하게 굳어있는 서울역 노숙생활만 해도 울고 싶을 지경인데, 아이들은 말썽에, 아내까지 사우의 속을 이해해 주지 않는다. 여유가 되지 않아 가족을 돌볼 수 없는 자신을 무심하다고 생각하고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가 야속하다.

우여곡절 끝에 도시락체인점을 시작하지만, 벼룩 등에 화전을 내 먹고 거지 똥구멍의 콩나물을 빼먹는 이 빌어먹을 세상은 시우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새 사업조차 일장춘몽이었음을 선언해 버린다. 자아, 마지막 길이 막혀버렸다. 이제 시우는 세상이라는 경기장에서의 퇴장을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한다. 속상하게 하는 아이들과 냉정하게 고개를 돌려버린 아내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는 가족. 그 가족에게 마지막 선물을 남기기 위해 시우는 자동차에 시동을 걸고 벼랑을 향해 돌진한다.

마치 우리 집, 내 가정의 말 못할 속사정을 보는 듯해 낯 뜨거운, 이 궁상맞은 스토리의 결론은 미묘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시우는 더 이상 그에게 생소하지 않은 실패를 또 한번 경험한다. 자살조차 실패한 그는 중환자실로 옮겨져 결국 가족들 사이에서 눈을 뜬다. 여전히 빚은 산더미 같으며 새 사업은 사기당한 채이다. 가족이 모일 방 한 칸도 없고, 시우가 노숙자 상태인 것도 변하지 않았다. 뭐 하나 변한 것 없는 상황 속에서 지은은 남편이 살아난 것에 기뻐하고, 아이들은 허둥지둥 달려와 아버지가 눈 뜨기만을 애타게 기다린다. 서로 미워하며 원망해도, 모여살 집 한 칸 없이 길 위에 흩어졌어도, 그들은 가족…… 결국 가족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굴레…… 혹은 희망


민시우는 노숙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다시 일어서기 위해 노력하지만 세상은 그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아니, 호의는 바라지도 않는다. 뒤통수나 치지 않아도 고마우련만, 세상은 때때로 잔인함을 과시한다.

비단 그에게 뿐이겠는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가장들에게 세상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다. 경쟁에서 밀려나지 않고자 회사에 충성하며 버텨내려 노력해보지만, 결과는 비참하다. 밀려드는 대체품들의 물량공세에 결국 사회에서는 떨려나고, 회사에서 고군분투한 그 기간 동안 가족들과 어떤 유대감도 형성하지 못한 탓에 사회에서 떨려난 가장은 가정에서조차 외면당한다. 누구를 위한 충성이며 노력이었는지 스스로도 모를 지경이다.

이 시대의 남자들은, 아버지들은, 가장들은 갈 곳이 없다. 그들은 다정하게 뺨을 부비며 말을 건네는 방법을 모른다. 그네들의 아버지들이 했듯이 벌어온 돈을 퉁명스레 내던지며 속으로 사랑한다 말해야 하는 줄 아는 소심하고 연약한 사람들이다. 알고 보면 미련하게 우직한 사랑만 가득하다 한들 말하지 않은 그 속을 누가 그렇게 잘 헤아려 줄 수 있을까? 그렇게 오해와 서운함이 쌓이고 결국 상처받는 건 가족 모두이다.

가족이란 참 오묘하다. 간사하다. 분명 혼자 만들기 시작한 가정이건만,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서 가정을 꾸리고 나자 가족은 더 이상 혼자서 없애거나 그만둘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마치 자식처럼. 자식이라는 것이 없을 때는 전혀 필요도 없고 생각 한번 해보지 않았건만, 한번 태어나고 나자 이제는 이것이 없으면 똑 죽을 것 같아지지 않던가.

내가 가족을 부양하는 것 같지만, 사실 나 역시 가족에 의해 지탱된다. 마누라와 새끼들이 날 보고 입 벌리고 밥 다고~ 밥 다고~ 악다구닐 칠 때마다, 이 왠수들~ 싶으면서도 그걸 보고 다시 힘을 내서 일어나게 되지 않던가. 앞에서야 저 왠수들 먹여 살리려고 회사일이 아무리 더럽고 치사해도 내가 일을 못 그만둔다 라고 투덜대지만, 뒤돌아서서 저게 내 뒷배려니 싶어 히죽 웃으며 어깨를 쫙 펴고 장딴지에 힘주고 다시 한번 일어서지 않던가. 가족은 굴레다. 희망이다. 내 등짐이고, 내 유일한 뒷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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